너무 꿈같은 이야기인가? (2)

너를 그리워하며...

by 소원 이의정

그는 마치 나를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나에게 어떤 이벤트를 해줄까? 뭔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어디로 놀러 갈까? 등

겹겹이 쌓여가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너.

그래서 어디를 가든 너와 있었던 추억의 장소들이 즐비하다.

그 장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고 가슴을 애이듯이 아픈 건 아마도 내가 철이 들어서일까?

그 기억이 소중하다는 것을 16년이 지나서야 느끼다니 말이야.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돌이 됐다는 이야기가 사실 같아...



강남역 교보사거리에서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걸어서 신사역까지 가는 길에 그리도 깔깔거리고 웃으며 행복했던 나였어. 아직도 내 웃음소리가 내 귀에 생생하거든.

그때 너는 나를 즐겁게 해 주겠다며 한쪽 어깨가 떨어져 나가든 말든 나를 들어 올리고 내리기를 수없이 반복했었지.

MT로 갔던 제부도에 밤늦게 들어갔는데, 이미 얼큰하게 만취 상태였던 나.

보름달이 금빛으로 모래사장에 바스러지며 반짝였던 것만 기억나 그리고 난 미친년처럼 뛰어다녔던 거 같아. 그런 나를 보호하고 아껴줬던 너.

우리처럼 젊은 20대 같았던 파도가 사납게 육지를 부술 듯이 철썩이던 동해 바닷가.

부둣가에서 정말 맛있게 먹었던 해물들과 소주.

괌의 어느 한적한 누드비치에 몰래 들어가 정성스레 선크림을 발라줬던 그 손길.

세부에서 해양스포츠 한다며 하루 종일 물놀이를 했던 우리

그렇게도 수없이 많은 낮과 밤에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점점점 형형색색으로 물들여갔었어.

헤어지고 3년간은 기억도 하기 싫었던 그 시간들이 지금은 방울방울 맺혀 내 기억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어주고 있어. 왜 점점 더 선명해지는 건데?

왜 불쑥 내 기억에서 자리를 잡는 건데?

그렇게 내 머릿속의 기억은 신기하다.

어느 순간 스멀스멀 선명하게 내 머리에 필름처럼 돌아가는 그날의 장면들이 어느 날은 "하아~"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러면 난 터덜터덜 냉장고로 걸어가 먹다 남은 와인이 있는지 살펴본다.

와인이 없다면 맥주라도 꺼내서 거실 창가로 간다. 방금 생각났던 그 아름답던 한 편의 기억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아련하게 보이는 저 멀리 팔달산 산등성이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 산은 과거의 시간처럼 흐리멍덩한데 목구멍으로 삼킨 너와의 추억은 어느새 머리에 파편처럼 박혀버렸다. 뇌수술을 해야만 꺼낼 수 있을 것 같은 되살아난 너와의 기억이 낮에 마시는 술과 함께 정신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그러나다 피식 웃고 이내 창밖이 더 안 보이는 것이 커다란 눈물이 뚝 떨어진다.

너를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나의 우매하고 무식한 연애 개념만은 아니었다.


일에 미쳐 살다가 늙어 죽기 싫었는데... 내 아름다운 시절이 다 가버렸네...

아마도 최근에 몇 번 만났던 시답잖은 남자들의 말과 행동에 비교대상이 내 기억 속의 먼지 쌓인 너라는 사람인 거 같다. 이젠 먼지도 없고 잘 닦아서 아주 반질반질하게 내 기억 속에서 반짝이고 있지만.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말이 아닌 행동이 먼저 나온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뿐이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었다. 믿고 싶었다.

10년 가까이 연애를 안 하고 살았기에 내 몸에는 연애세포가 이미 저세상에 갔었고, 그런 감정들이 나의 판단을 거부하고 소설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잘한 건지 못 한 건지 너는 나를 아주 이기적인 여자로 만들어 놨었다는 거다.

받기만 하는 사랑에 익숙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했던 나에게 입만 나불거리는 그들의 마음이 진심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몹쓸 이기적인 사랑을 하는 여자로 만들어 놨지만 그 기준이 너라는 사람이어서 다행이다.

잘 된 걸까? 이러다가 너 같은 남자가 지구 상에 없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건가?


왜 그렇게 주기만 했니? 나쁘다...



뜨거운 햇살이 길가를 태우던 여름 어느 날.

'블랙 아이드 피스'의 'Boom Boom Pow'를 들으며 한껏 들떠서 한적한 시골길을 가르듯이 달리고 있었지.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길 안내에서 벗어나 길을 잃었었고 그래도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블랙 아이드 피스'의 다른 신나는 노래들도 짜증 대신 광신도 같은 카 댄스를 흔들게 만들었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보통은 "뭐야! 어디로 가는 건데!" 옥신각신 싸울 법도 한데, 우리는 10대 아이들 마냥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에어컨도 끄고 창문을 활짝 열고 달리고 있었다.

길은 어디로든 통하기 마련이었고 그 목적지가 어딘지 몰라도 마냥 신나게 달렸었다.

길 가의 벼들이 찢어질 것같이 짙은 초록색으로 물결을 이루며 우리들과 함께 댄스 하듯 달려왔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너와 나, '김광석'을 닮기도 했던 너는 유독 '먼지가 되어'를 즐겨 부르곤 했었다.

너와 헤어지고 나는 '블랙 아이드 피스, 김광석'을 특히 멀리했다.

아니 전혀 듣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든 친절하고 싹싹해서 금세 너의 편으로 만들었던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어딜 가든 참 든든했었나 보다.

난 별로 할 것도 없고 그저 같이 다니면 웃기만 하고 먹기만 했다.

"왜 그렇게 버릇없이 나를 만든 거야?" 이젠 따질 수도 없다. 만날 수도 없으니까.

아니... 만나고 싶어도 지금 행복할 당신의 일상에 끼고 싶지 않다.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어? 기다렸다고...



청운의 꿈을 안고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우린 런던에서 다시 만났었지.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넌 술 마시면 매일 전화하고 그랬었는데, 왜 못 잡았어?

내가 색소폰 하는 남자 멋지다고 하니까 색소폰 배워서 매주 금요일마다 핸드폰으로 들려줬었잖아.

30분, 1시간 그렇게 나날이 발전하는 색소폰 연주에 나중에는 내 신청곡도 불러줬었지.

헤어지고 나서 그렇게 애매하게 전 남편과 연애하듯이 통화하고 그랬던 그 시간들도 지금은 너무 소중하다.

결국 난 12월에 영국으로 갔고...

다음 해에 여름휴가로 영국을 왔던 너.

아기자기한 이쁜 3층 집을 렌트해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던 나는 빈 방에 짐을 두라고 했었다.

그리고 런던에서 가장 멋지고 유명한 장소를 안내하며 오랜만에 만난 당신이 참 좋았다.

노팅힐의 유명한 펍에서 알바를 했던 나를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려주고, 근처 오픈마켓에서 이쁜 귀걸이를 사서 불쑥 선물이라고 내밀었었다.

자기껀 사지도 않고 하루 종일 구경하고 고작 산다는게 나 준다고 내민 수공예 귀걸이...

지금은 그런 마음들이 사무치게 고맙고 감사한데, 그때는 50%의 감동이었다.

그 소중함을... 그 진심을 왜 몰랐을까?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영국까지 온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테스코에 들러서 저녁거리를 사고 템즈강변을 걸어 내 런던 집으로 오는 길.

예쁘게 살았던 우리 신혼이 생각났었는데...

맥주와 와인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결국은 3층에 별이 보이는 방에서 항상 그랬다는 듯이 함께 잠이 들었다.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모르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깨진 그릇이라도 최신 기술로 잘 붙이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넘게 영국에서 오래된 연인처럼 지내고 다시 그 자리는 비워졌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는 변한 게 없었고 너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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