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5일 밤하늘에 불꽃놀이
#21
11월의 런던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 있는 쌀쌀하면서 습한 날씨였다.
한국과 같이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런던 곳곳의 공원과 가로수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래서 오늘따라 동네 호수 공원의 단풍길이 그립고 집 생각이 간절했지만 내가 선택한 이 길, 이방인의 그리움도 나에게는 아름답고 우아하게 다가왔다.
평상시와는 달리 긴장한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필릭스는 댄디하게 차려입고 하이드파크 산책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의 부탁으로 나는 그가 좋아하는 원피스와 카디건을 입고 나갔다.
'도대체 오늘 무슨 계획을 한 거지?' 긴장한 그의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그의 마음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뭔가를 미리 안다는 것은 김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11월 5일, 런던에서는 불꽃놀이 행사가 있다고 했다.
저녁 시간이지만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와 나는 손을 꼭 잡고 공원 안쪽으로 걸어갔다.
"가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대해서 죄책감이나 배신감 같은 거 안 느꼈으면 좋겠어. 미리 말하고 시작할게." 그는 걷기를 중단하고 두 손을 꼭 잡고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았어요. 죄책감. 배신감 그런 내용 아니길 바라고 오해하지 않을게요."
살짝 긴장한 그에게 미소를 보였다.
"나에게 물론 가족. 가족 소중해. 그런데 당신도 어느 정도 느꼈겠지만 우리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 우리 가문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어. 누군가를 위해 살지 말고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 그 계기는 내 친구가 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백혈병으로 죽었어. 그 친구는 죽기 전에 나에게 말했지. '필릭스, 인생이 너무 꿈같았어. 그리고 아름다웠어. 만약 나에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래. 너도 꼭 그렇게 살길 바래.' 난 그날 충격을 받고 일주일 이상 학교를 못 갔어. 그 당시 난 캠브리지를 다니고 있었거든. 경영학과는 부모님이 원하셨던 과였고. 난 내 길을 선택했어. 전에도 말했었지만 난 지금 아주 만족스러워. 내가 해낸 일에 있어서 난 행복해. 그래서 난 내 삶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고. 그리고 어느 날 반짝이는 보석같이 나타난 당신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 우리가 떨어져 지낸 3개월이 나에게 많은 변화를 줬어. 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알았겠지만 당신을 만난 이후 놀라운 감정을 느꼈거든. 난 그걸 지켜낼 거야. 내 가족과 관계가 끝난다 해도."
"필릭스. 가족과 관계를 끝낼 순 없어."
"가은.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당신에게 또 털어놔야 할 게 있어. 난 조부모님으로부터 이미 많은 상속을 받았어. 내가 가끔 출장 간다고 했었지? 그 출장지는 포도밭과 와인제조 공장이었어. 스파클링 와인 공장을 갖고 있어. 때가 되면 얘기하려고 했는데. 이젠 레베카 때문에 더 이상 숨길 문제도 아니라 생각해."
"매 달 거의 두 번씩 갔었잖아요. 그게 방송국 출장이 아니고 와인공장 가는 거였어요?"
"어. 난 레베카의 재산도 필요 없고. 우리 집이 그 가문과 엮일 일도 없어. 적어도 나하고는."
"아... 그래요. 더 있어요? 말한 김에 다 말해보세요."라고 말하는 순간 밤하늘은 총 천연색의 불꽃이 팡팡 요란한 소리를 쏟아내며 터지고 있었다.
"와아. 폭죽까지 나를 돕는군. More... 더 있어."
그는 아주 진지하고 근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 뭐예요? 더 놀랄 게 있어요?"
놀리듯 말하는 내 앞에서 필릭스는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은. 내 인생은 너를 만나고 완벽해졌어. 당신이 허락한다면 나와 평생 함께해 줄래?"
그의 눈은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작은 박스 안의 다이아몬드 반지는 불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들고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릭스..."
너무 갑작스러웠지만 이 모든 순간이 벅차게 아름다워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아... 필릭스. 그래요. 평생 함께해요." 그는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고 나는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폭죽을 배경으로 뜨거운 키스를 했다.
"가은. 고마워. 사랑해."
"사랑해요. 필릭스."
"가은. 런던은 '레지스터 오피스(Resigster Office)'라고 혼인식도 할 수 있고 신혼부부로 서류상 등록을 할 수 있는 센터가 있거든. 나 혼자 갈 수 없고 우리 함께 가서 서류에 사인해야 해. 서류상 부부로 등록을 해버리면 부모님도 더 이상은 하실 말씀이 없으실 거 같아. 내일 오전에 가자."
"한국의 구청 같은 곳이군요. 알겠어요. 나도 이 사실을 엄마하고 동생한테 알려야 할 것 같아."
한국 시간과 시차를 계산할 겨를도 없이 나는 빨리 엄마와 동생에게 알리고 싶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동생 민주가 영상통화 수락을 했다.
"어... 언니. Hi. 필릭스..." 민주는 눈을 비비며 침대 옆 스탠드를 켰다.
"민주야 미안. 자고 있었구나."
"어... 그래. 지금 여기는... 한국은 새벽 4시에. 언니!!! 아... 무슨 일 있어?"
우리는 주변 풍경을 보여주며 폭죽이 터지는 하늘도 보여줬다.
"민주야 잘 지냈지? 엄마도 건강하시고?"
"어. 우린 다 잘 지내고 있어. 며칠 전에 통화해 놓고는 무슨. 런던은 행사 하나 봐? 불꽃놀이하는 거?" 민주는 방에 불을 켜고 화장대 앞으로 가서 앉았다.
"민주야. 나 오늘 필릭스한테 프러포즈받았어."
"꺄아!"하고 소리치던 민주는 새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와아! 언니, 필릭스 축하해! 잠깐만. 어차피 엄마는 새벽에 일어나시니까. 엄마! 엄마!" 민주는 순옥방으로 뛰어갔다.
"엄마! 엄마 일어나 봐. 여기 좀 봐봐." 다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민주는 엄마를 흔들었다.
"어머. 가은아."
"어. 엄마. 저 필릭스랑 약혼했어요. 오늘 프러포즈받았어."
가은은 커다란 알이 박힌 반지를 화면 앞으로 내밀었다.
"어. 뭐야. 까르띠에야. 이쁘다. 필릭스 센스 있네." 민주는 엄마와 얼굴을 비비며 화면에서 반지를 보기 위해 들이밀었다.
"그래? 그랬어? 필릭스. 필릭스 얼굴 좀 보여줘라. 가은아." 순옥은 떨어지는 눈물을 연신 닦으며 필릭스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에게 한국말로 말했다.
"필릭스. 가은이 잘해줘야 해. 걔가 런던에 아는 사람이 누가 있나? 믿을 사람이라곤 자네뿐인데. 내가 곁에 있음 두 사람 잘 챙겨줄 텐데. 너무 멀리 있어서..." 순옥은 말을 잊지 못하고 눈물을 닦았다.
"좋은 소식 듣고 왜 눈물이야. 언니. 알았어. 형부. 우리 언니한테 잘해요. 축하해. 그리고 엄마가 한 말씀은." 민주는 순옥이 했던 당부의 말을 해석해서 들려주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저 가은이한테 잘할게요. 그리고 한국어도 공부할게요. 어머니하고 민주 크리스마스 때 런던 오세요. 제가 티켓 보낼게요."
"꺄울! 형부. 진짜야? 나 휴가내야겠네. 멋지다. 울 형부." 민주는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뛰었다.
"뭐라는 거니? 가은아? 민주는 왜 이러니?"
"어. 엄마. 필릭스가 크리스마스 런던에서 보내자고. 비행기 티켓 보낸다고 했어요."
긴 통화를 끝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은. 나 내일 집에 다녀올 거야.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더 이상 레베카와 엮이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고 올까 해. 그녀를 만나봐야 말이 통하지 않거든. 만나고 싶지도 않고."
"저는... 저도 같이 갈까요?"
"아니야. 가은.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아. 내가 알아서 해결하고 올게. 위스키 한 잔 마실래?"
"오늘을 기념해야죠. 프러포즈받은 날." 나는 필릭스가 걱정됐지만 그가 잘 해결하고 오길 기도했다.
그는 아침부터 서둘러 슈트를 차려입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준비한 아이보리 컬러의 칵테일 드레스를 꺼내놓았다. 레이스와 금빛 자수 그리고 진주 장식이 들어간 드레스는 너무 아름다웠다.
"언제 준비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필릭스."
"가은. 당신은 따로 준비할 게 없어.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내 책임도 있는 거고. 오늘 오피스에 가는 것은 결혼식은 아니지만 법적인 신고를 한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온 가족들과 다 함께 결혼식을 올릴 거야.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가은은 필릭스를 와락 껴안았다.
"그럼. 행복해야지. 증인이 필요해서 닐과 유정에게 부탁했어. 오늘 고맙게도 시간을 내준다고 했고."
'나 신경 쓰지 말라고 전부 준비해 놓다니. 필릭스 정말 멋지다.' 나는 그의 철저한 준비에 감동받았어.
우리 커플과 닐과 유정은 오피스 내부의 시설에 감탄했다. 작은 규모의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식장과 잘 꾸며진 넓은 정원은 하객들 피로연을 하기에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각자 혼인 서약문인 "정식 결혼 서약문" (Full Marriage Vows)을 낭독했다.
필릭스가 선약문을 읽을 때 그의 진지하고 그윽한 눈빛에 나는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서류에 사인을 했고 직원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사무실 직원들과 증인인 닐과 유정의 축하 박수를 받으며 법적인 서류가 통과 됐다.
직원들과 증인으로 온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정원에서 잠시 시간을 갖었다.
"꺄아! 언니 축하해. 아니. 런던 와서 3개월 만에 있을 일이야? 무슨 초고속 결혼식까지."
"나도 믿기지 않아. 나 꿈꾸는 거 아니지?"
"언니. 꿈 아니고. 어찌 됐던 필릭스는 내가 연결시켜 준 거라 봐도 될 거 같네. 옷 한 벌 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하하하. 유정아 내가 옷뿐이겠니. 뭐 갖고 싶어?"
"신중하게 생각해서 알려줄게. 하하하."
오늘따라 유난히도 파란 런던의 하늘과 빛나는 태양이 우리 앞길을 비추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