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목에 칼을 차야 할 죄인입니다.
이 몸이 생겨날 때 임을 좇아 생겨나니, 한평생 인연임을 하늘이 어찌 모를 일이던가?
나 하나 젊어 있고 임 오로지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가 전혀 없구나.
평생에 원하건대 (임과)함께 살자 하였더니 늙어서야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워하는가?
엊그제까지는 임을 모시고 광한전에 오르고는 했는데, 그 사이에 어찌하여 속세에 내려오게 되니
올 적에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지 삼 년이라. 연지분 있지마는 누굴 위하여 고이 단장할까?
마음에 맺힌 설움 첩첩이 쌓여 있어 짓는 것이 한숨이요, 흐르는 것이 눈물이라.
인생은 유한한테 시름은 끝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는 듯 흐르는구나. 더위와 추위가 때를 알아 지나가는 듯 다시 돌아오니 듣거니 보거니 느낄 일이 많기도 많구나.
- 중략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 정철의 사미인곡 원문 해석
왕에 대한 사모송인 사미인곡은 여인이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인양 쓰였지만 나라와 임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충성심이 구구절절하다. 그리고 나는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절하다. 우선은 절절하다는 맥락에서 문득 사미인곡의 내용이 궁금했다. 사계절의 풍경을 단정한 문체에 녹여내 우아하게 표현했다. 정말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부분에 범나비가 되어 임에게 가겠다는 것이 어찌도 애절한지 읽고 또 읽게 되었다.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으리라.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
차라리 죽어서 당신 곁으로 가겠다는 것 아닌가? 간접적인 은유를 쓴 표현이 이리도 애달프고 사랑스러운지 이런 문체는 정말 대대손손 아름답게 느껴지는 듯하다.
그는 나에게 편지와 쪽지를 많이도 썼었다. 연애 초반에는 거의 매일 쓴 편지를 전해줬고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영수증 종이에 그림과 함께 구구절절 편지를 보냈다. 아기자기한 그림과 글이 가득한 편지는 아직도 베란다 선반에 한 박스 가득 담겨 있다. 그 먼지 쌓인 박스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비밀을 머금고 있는 듯 하지만 열어주길 원하며 나를 유혹하진 않는다. 그 박스를 여는 순간 울다 웃다 기분이 널뛰기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주말부터 박스 안이 궁금해서 몇 번을 들락날락 베란다를 두리번거렸다.
과거의 나는 더 사랑하는 그가 의례 편지를 쓰며 사랑표현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못난 나에게 사랑을 주기만 하는 그의 편지에 바쁘다는 핑계로 답장 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성공에 대한 욕망이 그득했던 난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에 더 가치를 두었던 것 같다. 사랑도 편지도 받기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다. 나의 못난이 성격으로 답장을 했다면 그 편지가 지금도 남아 그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수도 있다. '그 여자와 헤어지길 잘했네.'
그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미안함을 넘어 스스로에 대한 번뇌가 되었다.
다시는 그리 살지 말자는 각성과 함께.
임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좇으려 하노라.
어리석은 나는 그의 숭고한 희생적인 사랑을 몰랐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