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심리학>을 읽고
모든 스포츠에는 선수단의 오버롤 만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흐름'의 영역이 있다. 선수단의 액션 하나가 사기로 연결되고 경기력으로 보여져 각본없는 드라마를 연출하곤 한다. 이 예시를 가장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종목은 야구다. 4대 스포츠 중 유일하게 공격과 수비가 분리되어 있고, 상황에 따른 역할이 정해져있다. 그러다보니 야구를 보고 있으면 공 하나를 던질 때 투수의 심리, 타석에서 공을 노리는 타자의 심리에 따라서도 경기 흐름이 얼마든지 바뀌게 된다.
<분명 야구 경기를 관람하며 우리는 빠른 속도와 힘, 기민한 반사반응을 수없이 본다. 하지만 어떤 경기를 보든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은 바로 '생각'이다> 내용 中
내가 좋아하는 세 개의 종목, 바둑과 컬링 그리고 야구에는 공통점이 있다. '턴'이 있는 종목이라는 점이다. 축구와 농구, 배구 처럼 한 프레임에 공격과 수비가 공존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각 장면별로 생각을 많이 할 수 밖에 없다. 생각이 많아지면 상황별 데이터가 쌓인다. "OO에 만약은 없다"라는 말도 야구에서 가장 잘 쓰인다. 특정 상황에 다른 판단을 내렸다면 결과가 어떻게 바뀌었을까?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구를 오래 보고 많이 보다보면 각 상황별 실시간으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야구는 원래 이런 스포츠다. 다만 야구를 꼭 이렇게 피곤하게(?) 즐길 필요는 없다. 이런 야구를 더 대중화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내용을 어필하는 것보다 다른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를 알리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야구 저변을 넓히는 것과는 별개로 '생각' 스포츠인 야구를 몇몇 재밌는 에피소드들과 함께 세상 밖으로 알려주는 일은 매우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책에서 다룬 챕터가 조금 올드하고, MLB를 보지 않았다면 공감하기 어려운 내용이 다소 많다. 차라리 '시프트를 사용했을 때의 투수 심리 만족도', '고교야구 주장들이 프로에서 성공하는 심리적 이유'와 같이 조금 더 말랑말랑하고 디테일한 주제가 더 쉽게 읽히고 2022년에 조금 더 맞지 않았을까도 생각한다.
1. 시프트를 사용했을 때 투수들의 심리는?
KBO리그에 수비 시프트가 도입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서 먼저 리빌딩 팀을 중심으로 도입되더니, 한국에도 외국인 코칭스태프가 구성된 한화에서 제일 먼저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실제로 수비 시프트는 나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발이 빠르지 않은 타자들에게 압박을 주기도 했고, 당겨치기 일변도를 보이는 파워히터들에게는 '번트를 댈까?' 라는 고민이 들게끔 심리적 위축을 주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수비 시프트도 결국 수비수를 세우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제 아무리 분석을 통해 확률높은 위치에 섰어도, 타자가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하면 이정후와 같이 얼마든지 깰 수도 있다. 수비 시프트의 성공률이 실패보다 압도적으로 높지 않다면, 이는 오히려 투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투수 인스트럭터 등을 지낸 손혁 전 감독은 "투수가 직접 지정하지 않은 수비 시프트는 오히려 투수의 심리 상태를 흔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맞은 타구에 대한 기대심리가 안타로 귀결되면, 마치 수비수가 실책을 했을 때 상황만큼 흔들린다는 것이다. 투수가 전적으로 코칭스태프의 수비 시프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이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면 되지만, 빗맞은 땅볼 타구가 코스 안타가 되는 것을 기분좋아하는 투수는 사회인야구 4부에도 없다.
2. 학생이 하루 24시간을 '야구'에만 몰두하면 안되는 이유
'성격의 차이가 미래를 가른다'라는 챕터가 있었다. 맞다. 굳이 따지자면 야구선수가 아니더라도 사회에 당장 내던져도 살아남을 즉시전력감 성격을 갖췄다면, 당장의 기량 2%가 부족해도 야구선수로 얼마든지 노력해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즉시전력감 성격을 갖추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또래들과 야구선수가 아닌 '인간 대 인간'으로 많이 소통하고 표현하고 수용하고 베푸는 것이다. 그 역할을 꼭 해내야하는 야구부 내 '주장'들은 그래서 프로에 입단한 뒤로 성적과는 별개로 오래 살아남는다.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 모두 주장을 경험했던 프로선수 A는 비교적 평범한 야구 툴에도 불구하고 2차지명 1라운드에 호명됐다. 10명의 1라운드 선수 중 가장 낮은 계약금으로 입단했으니, 실력 이외의 무엇인가를 봤을 것이다. 당시 스카우트팀은 '인성', '배우는 자세', '애늙은이' 이렇게 3가지 키워드를 귀띔해줬다. 실제로 루키 시즌 갖은 시행착오를 겪었음에도 A는 훈련 중에는 배우는 자세로, 경기 중에는 팀 분위기와 팀을 위한 자신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갓 데뷔한 신인이 1군 무대에서 좋은 수비력을 뽐낸 경기에서 팀의 패배에 슬퍼하는 프로정신이 꽤 인상깊게 남았었다.
*안타깝게도 1차지명에 지명됐음에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성장이 더딘 선수들이 실제로 꽤 많다. 스카우트들에 따라서는 "성격이야 군대 갔다오면 좋아지고, 코칭스태프가 얼마든지 키워내면 된다. 신체조건이 제일 중요하다"라고 언급한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이미 누가봐도 프로에서 통할 만큼 완벽한 기량을 갖추지 않았다면 선수로서의 자세도 잘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이다. 나이만 스무살이지, 24시간동안 야구에만 몰두한 사회초년생 야구선수는 심리적으로 넘어야 할 벽들이 매우 많다. 그것이 선수에게 다가오는 체감 속도는 오타니의 속구보다도 매섭고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