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평 반의 진땀 나는 야구세계를 읽고
"어디에 계시든 오늘 하루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오후 7시, 직장인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야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시각, 야구장 한 켠에서 오늘 하루를 달래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LA 다저스에서 60년 이상 마이크를 잡은 빈 스컬리는 한결같이 위와 같은 멘트로 야구장을 방문해준 팬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두 평 반의 진땀 나는 야구세계를 읽고'의 저자인 한명재 캐스터와 나는 가장 롤모델로 삼은 캐스터가 빈 스컬리라는 접점을 갖고 있다.
내 꿈은 스포츠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는 것이다. 12살의 어린 아이가 "야구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는 마음이 목표의 출발점이었고, 스포츠 현장에서 해볼 수 있는 여러 분야의 활동과 일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도 '스포츠캐스터'라는 큰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한명재 캐스터는 그 시간동안 계속해서 현직으로 두 평 반의 진땀 나는 야구세계를 지키고 있는 분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만났던 젠틀한 모습이 꽤 기억에 남는다.
LA 다저스 장내 아나운서였던 빈 스컬리는 '혼자서' 중계를 한 것으로 특히 주목을 받는다. 해설자 없이 덤덤하게 혼자 경기 실황 등을 중계해온 것이다. 물론 매일 그렇지는 않았다. 어쨋든 우리나라 팬들에게는 생소한 영역이고, 또 스포츠캐스터들에게는 꿈의 영역이기도 하다. 해설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이 직접 한 편의 이야기를 물 흐르듯 말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낭만일테니까. 한명재 캐스터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이걸 현실로 끌어내기도 했다. 몇 년전 MBC Sports+에서는 한명재 캐스터 단독 중계로만 야구 경기를 중계한 바 있다. 막상 하고 보면, 그렇게까지 이질적인지 모른다. 맞다. 야구 팬 수준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지금, 어찌보면 생생한 현장음이 때론 더 매력적으로 들릴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스포츠캐스터가 책을 썼던 사례들은 종종 있었지만, 스포츠캐스터와 관련된 책을 보기는 어려웠다. 스포츠캐스터 직업군 자체가 보기와는 다르게 전혀 안정적이지 않으며, 2022년 현재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비중이 너무나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는 중계권등 스포츠 중계와 관련된 외부 환경의 변화가 만든 결과물이다. 그래서 스포츠캐스터 타이틀을 달고 책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다. 이 책 안의 내용이 일반 독자들에게 나름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는 이유다.
*프리랜서 아나운서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꼭 별도로 다뤄보려고 한다. 스포츠방송사가 아직도 TV에만 의존해 인터넷, 모바일 플랫폼을 만들지 못한 영향으로 수입이 줄었고, 거액의 중계권이 부담스러워졌으며, 독자 플랫폼을 갖춘 방송사가 중계권을 독점하는 시스템. 이것이 만든 캐스터 채용의 변화. 내 꿈에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의 여러 조건들.
"중계방송은 무엇을 쓰느냐보다 무엇을 안쓰냐가 더 중요하죠"
꼭 중계방송에서 뿐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자신이 어느 일을 하던 매우 중요하게 다가오는 한 문장이다. 나 역시 공감한다. 특히 기자 일을 할 때 제일 많이 느꼈었다. 내가 취재한 내용을 100% 모두 지면에 실으려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모험이고 욕심이다. 그리고 내용 전체가 모두 신문에 담아졌다면 그것은 행운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는 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잘려나가는 내 취재 내용을 보면 속이 상했었다. 근데 따지고 보면, 발전하기 위해서는 150%를 가져와 그 중 알짜배기 100%를 담아야 한다. 이에 나머지 50%를 버리더라도 '속이 상하지 않을' 일을 택해야 겠구나 생각했다. 지금 내가 기자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아마 중계방송을 준비하는 '나'라면 방송으로 못 담는 부분이 있다고도 아쉬워하지 않을텐데.
레귤러한 스포츠캐스터 지망생 시절 이 책을 읽게 됐다면 더욱 동기부여를 강하게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금이라고 동기부여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현재는 제도권 내의 캐스터를 목표로 두진 않는다. '제도권'의 범위가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 스튜디오에서 스포츠 관련 방송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렇게 마음을 먹으니 나이에 따른 구애를 받을 일도 없고,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싸워야 할 일도 없다. 그 순간까지 한명재 캐스터가 써왔던 '방송의 가치', '방송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해 두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