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고 집에 귀가할 때 어렸을 적부터 큰 걱정이 없었다. 그말인 즉 조금 졸아도 멀리 갈 일이 없었고, 서울의 '노도강' 끝에 살았던 나는 어디를 가든 종점 근처였으니까. 대학교 때 밤새 신문 마감치고 집에 가는 길에 잠들어서 7호선 종점을 찍고 다시 강남갈 뻔한 적은 있었으나 그 외에 기억에 남을만한 '큰 사고'는 일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집에 올 때마다 마음을 놓고 못 올 일이 생겨버렸으니. 4호선이 남양주로 연장이 되고 나서 부터다. 이제는 집에 올 때 '당고개행'이 아닌 '진접행'을 타면 잠을 잘 엄두가 안난다.
어느날 하루는 모임을 갖고 신도림에서부터 집까지 귀가를 하고 있었는데. 용산역에서 환승을 하다가 핸드폰을 보도블럭 블록한 부분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핸드폰 화면 아래 부분의 액정이 깨져서 인식이 잘 안되는 정도가 되버렸다. 어찌하여 그런 억까를 당하나 싶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손에 힘이 잘 안들어갔나 싶었다.
그런데 신용산역에서 4호선을 타고 올라오던 도중 피곤해서 잠들었다. 분명 30분 정도는 걸리니까 금방 다시 깨겠지 싶었는데 눈을 떴더니 내 인생 처음보는 구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고 나온 지하철 누나의 목소리.
"이번 역은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진접, 진접 역입니다"
머리가 하얘졌다. 일요일이었던 그 날의 현재 시각은 자정을 향해 다 가고 있었다. 다시 돌아갈 열차가 없을 시각이다. 나는 진접행 막차를 탄 채로 졸아서 내려야 하는 수유역에서 한참을 지나 남양주시 진접읍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일단 침착하게 진접역에서 내려서 대책을 생각해봤다. 당고개역만 됐어도 내가 아는 동네고 노원구에서 집까지 택시타고 갈만한 거리니까 그렇게 걱정을 안했을텐데, 여기는 경기도다. 분명 신도림역에서 출발했는데 거꾸로 나는 경기도에서 조난을 당해버렸다. 그런데 핸드폰은 깨졌다.
그런데 지하철 막차의 종착역에는 '국룰'이 있다. 웬만하면 막차의 종착역 앞에는 조난당한 사람들을 위한 택시들이 대기를 하곤 한다. 그래서 역을 터덜터덜 내려오면서 줄서있을 택시들을 내심 기대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단 한 대의 택시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뭐지. 경기도는 원래 이렇게 정이 없는 것인가?
결국 택시를 불러야 했다. 그런데 내 핸드폰은 깨져있지 않은가? 카카오T 어플을 켤 수 있고 아이콘을 누를 수는 있지만 타자를 칠 수 없었다. 손으로 화면을 클릭해도 일부는 인식이 되질 않았다. 그 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해버렸다.
카카오 택시가 없는 10년 전 옛날로 돌아가버렸다. 그런데 난 난생 처음 와버린 동네에서 막차 끊긴 시간에 집에 가기위한 택시를 잡아야 했다. 남양주도 사실 별내 정도나 사회인야구하러 가봤지 진접까지 뭐 가볼일이 뭐가 있었겠어. 그래도 '택시만 잡으면' 이라는 생각에 침착하게 택시를 잡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10분, 20분이 흘렀을까. 지나가는 택시는 왜이리 사람들이 타있는지. 혹은 예약택시만 지나가고 있었다. 몇몇 버스가 지나가기는 하는데 서울을 갈만한 사이즈의 버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40분이 흘렀을까. 밤 1시가 넘어서야 한 대의 택시를 잡았다. 황급히 "서울 가세요?"라고 물은 뒤에 오케이 사인을 받고 이제서야 조난상태에서 구제받을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나니까 조금 정신이 들었다. 하필 또 왜이렇게 날씨는 쌀쌀한거야. 침착하게 폰을 열어 S펜을 꺼냈다. 오, 손가락으로는 깨져서 인식이 안된 화면이 펜으로는 모두 정상작동했다. 갤럭시 만세, 삼성 만세. 그렇게 지도를 켜서 본 내 위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기사 아저씨가 내 체감상 직선 동선으로 가지 않길래 이상하다 싶어서 물었다. 혹시 제대로 가고 계신 것이 맞냐고. 맞단다. 아니 왜 진접에서 수유로 들어오는데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톨게이트를 지나고, 도봉산 수락산으로 다시 돌아서 도봉동을 거쳐 들어와야 하는거지? 그냥 4호선 동선처럼 당고개역 쪽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 아냐?
의심할만도 했던 것이 불과 지하철로 15분 정도 잠들어서 조난당해서 온 것 치고는 택시를 1시간 가까이 타서 돌아왔다. 택시비가 3만원이 넘게 나왔을 정도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다음날 지도를 다시 찍어봤다. 그런데 그럴만 했다. 수유역에서 진접까지는 20km가 넘는 거리였고 나는 사실상 신도림 모임장소에서 집까지 택시타면 나올 택시비를 조난당하는 바람에 정 반대방향에서 타고 온 것이었다. 4호선 정거장 수로는 3~4개만 연장된 것인데 그 거리는 평소 지하철역 간의 거리보다 배 이상으로 길게 된 것이었다.
진접이 그렇게나 먼 곳이었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경기도는 크다"
너무나도 긴 거리가 지하철로 연장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 이제는 4호선을 타고 귀가할 때마다 열차의 행선지가 어딘지를 의식하게 됐다. 당고개행이 아닌 진접행이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와야 한다. 지하철로 한글을 깨쳤다는 4살 때부터 거의 25년동안 한 번도 지하철 타고 오며 걱정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넋 놓고 있으면 세상의 끝으로 끌려가는 것이니까.
수도권 지하철이 보통은 남쪽이나 동쪽으로만 많이 연장되곤 하지 북쪽으로 연장될 일이 없어서 남의 일인 줄 알았는데 요즘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얼마 전 1호선은 연천까지 연장됐는데, 창동역에서부터 연천역까지 거리를 재보니 50km였다. 반대방향으로 따지면 부천 인천까지도 갈만한 거리다. 정말로 경기도는 너무나도 크다. 1호선 타고 신설동역에서 보통 환승을 하지만 '잠들어도 창동이겠지' 싶어서 마음을 놓은 그 때, 재수 없으면 DMZ 앞까지 갈 수도 있다.
새삼 경기도민들을 리스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