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km 마라톤 트라우마 마라톤으로 극복하기

마라톤을 시작한 계기와 의미-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by 미스터 엄

[짧은 소개]

기업에서 HRM&HRD를 책임지는 인사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사람들 앞에 설 자리가 많은 직무 특성상 말하는 것, 글 쓰는 것 모두 즐기는 편이다. 다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는 말수가 조금 줄어든 편이다.


13년간 맛집 블로그를 운영하며 사진과 글쓰기, 먹방을 모두 즐겼다. 이에 따라 10kg 이상 늘어난 몸무게 감량에 세 번 도전했고, 모두 성공하는 실행력도 갖추었다.


KakaoTalk_20250918_080754201.jpg 발표의 달인이 되고 싶은 인사쟁이 입니다. 기획하고 정착시키고 공표하는 순간이 제일 설레이죠.
KakaoTalk_20250918_080727201.jpg 전사 전략발표 및 아이스 브레이킹
KakaoTalk_20250918_080709201.jpg 맛집블로거로 활동할 당시 인터뷰



1)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바뀐 일상

- 숨 막혔던 5주


2022년 7월, 에어컨 바람만 쫓아다니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은 단지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한 세상의 끝과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강인한 체력과 밝은 모습으로 일상을 보내던 60대 초반의 남자였다. 건강 걱정 없이 살았던 그분이 갑작스러운 균형감각 이상과 구음장애 증세를 보이며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 방문했다. 결과는 뇌출혈이 있지만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알고 보니 신경외과에서 뇌를 담당하는 교수님은 학회에 가 계셨고, 척추를 담당하는 교수님만 남아 있었다. 서둘러 전원 신청을 하였고, 지역 내 상급종합병원으로 전원을 하였다. 그게 아버지가 내 차에 탔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걸을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이자 바깥세상을 마주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2025년 기준 21년된 나의 차. 인생의 희로애락이 많이 묻어있어 차를 바꾸지 못하고 있다.


실내만 리모델링하고 아직도 잘 타고 있다.


검사 결과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뇌내출혈과 지주막하출혈 진단에 이어 숨겨진 병마-폐암 4기와 전이된 뇌종양까지. 의사들의 냉정한 말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저 “어떻게든 회복할 거야”라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붙잡았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의 개두술과 뇌실외배액관 수술을 비롯해 션트 수술까지 받으면서 고통과 싸워야 했다. 나 역시 병원과 회사를 오가며 간병과 업무를 병행하는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그때의 나는 매 순간 초조했고, 두려웠으며, 무엇보다 “내가 과연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끝없는 긴장과 절망 속에서, 한밤중에도 아버지의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내 휴대전화 벨 소리의 볼륨은 제일 큰 상태였고, 종종 새벽에 걸려 오는 병원 전화에 즉각 반응하기 위해서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다.


몸과 마음은 지쳐갔지만, 회사 윗분께서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봐. 아니면 나중에 평생 후회할 수 있어.”라는 말이 그나마 내게 버티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현실은 잔혹했다. 뇌출혈 부위는 늘어만 갔고, 폐암 역시 유전자 변이도 없어 표적치료도 힘들고, 감마나이프나 항암치료도 불가능하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나는 그 무력감과 맞서 싸워야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점점 흐려지고, 가족의 고통 또한 깊어지는 가운데 매일매일 술로 마음을 달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만 해도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자기 관리와 통제를 중요시했던 나에게, 이렇게 무너지는 순간은 참담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한계가 있고 그 한계에 부딪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한계 앞에서 비로소 나는 겸손과 연민을 배웠다.


신경외과, 순환기내과, 혈액종양내과 등 다양한 과의 협진이 필요했기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피드백이 없던 병원에 너무 화가 날 때도 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담당 교수님 올라오라며 소리치고 행패 아닌 행패도 부렸었다.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좋아진다는 말을 들을 때면 꽉 쪼이던 가슴이 한결 숨쉬기 편한 느낌이었다.


그것도 잠시 이제는 연명장치에 의존하는 아버지에게서 연명장치를 뗄 것인지 가족 구성원들과 의논하라고 했다. 그렇게 너무 고통스럽게 붙잡지 말고, 보내주자는 만장일치에 따라 2022년 8월 29일 11시 3분 아주 먼 곳으로 먼저 보내드렸다.


심장이 먼저 멈춰 사망 판정을 받더라도, 귀는 가장 늦게까지 열려 있다고 한다.그동안 못 했던 말을 몇 마디씩 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3년 전 그 상황이 너무 생생하다.


2) 아버지를 살리고자 발 벗고 뛰었던 이유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서울에서 분당으로 이사 왔다. 중산층 이상으로 원하는 대부분을 지원받으며 풍족하게 살았던 기억이 가득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결국은 집을 넘기고, 아버지는 다른 지역으로 빚을 갚기 위해 가셨다. 동생은 공무원이라 공무원 숙소에서 살게 되고, 어머니와 나는 작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다른 지역으로 가신 지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먼저 연락드린 적은 없었다. 결국 그 많은 빚을 모두 갚고, 2022년 3월 우리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제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세 명이 한집에 살 수 있었다. 비록 예전에 비하면 작고 허름한 집이지만, 행복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일을 하고 계셨고, 아버지가 먼저 퇴근하시면 어머니가 내리는 버스정류장에 마중 나가시곤 했다. 어머니 짐을 들고 집에 와서 같이 저녁도 드시고, 산책과 운동도 같이 다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하늘이 우리 가족에게 허락했던 시간은 고작 5개월이었다.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장례식 이후에야 그동안 빚을 갚기 위해 아버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버지 지인분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주문하면 조금만 드시고, 저녁에 고시원에서 먹기 위해 포장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1원이라도 더 아낄 수 있고, 빚도 청산해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나이 들면서 받아야 할 건강검진은 사치였다고 생각하셨으니 받았을 리 만무하다.


한 번도 연락드리지 못한 미안함, 용돈도 드려본 적 없는 미안함, 건강검진 시켜드린 적 없는 미안함. 그래서 병원 임상교수에게 소리치며 난리를 쳐서라도 살리고 싶었나 보다. 회사에서는 1시간 혹은 2시간만 근무하고 바로 병원으로 이동하는 날도 많았었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돌아가신 다음 달부터 국민연금도 나온다고 좋아하셨는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 같은 타이밍인가.


아버지가 응급실로 간 날, 같이 점심으로 짬뽕에 소주 한잔하자고 하셨는데 약속이 있어서 “다음에 같이 먹어요”라고 말했던 게 마지막이다. 가족끼리 다시 합친 이후에 제대로 오붓하게 식사도 못 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미어진다.


“아빠, 하늘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이번 생 잘 마치고 올라가는 날, 그때 짬뽕에 소주 한잔하면서 못 나눈 이야기 나눠요.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드시고 싶어 했던 짬뽕 그리고 소주 한잔



3) 일상으로 복귀, 그리고 선택의 기로

- 마라톤으로 치유해가는 일상


장례식이 끝나고 방문해 주신 분들께 보낸 문자.


안녕하세요. 故) 엄OO 집사님의 장남 엄OO입니다. 2022년 8월 29일 부친상에 각별하게 조의를 베풀어주시어 금일 장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국인데도 한걸음에 달려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따뜻한 조문과 기도로 저와 저희 가족을 위로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문자로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고인의 떠나는 길에는 뇌출혈, 뇌종양, 폐암을 이겨내며 겪었던 고통을 내려놓고,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게 천국으로 보내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받은 위로가 너무 커서 눈 속에, 머릿속에 기억하기보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 새겨 넣겠습니다. 장례식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비가 오더니 오늘은 개이네요. 아픈 마음 덮어두고 그 위에 좋은 일 하나씩 쌓아가겠습니다. 항상 행복한 일만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슬플 일보다는 좋은 일이 많은 일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에서는 책임자급으로 주위를 품어주는 나눔의 삶으로, 인생에서는 다시 신입사원의 마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삶을 살겠습니다. 여러분들과 희로애락 함께하며 인생의 깊이도 함께 나누고 배우며, 남은 인생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이 깃들길 기도하겠습니다.


- 故) 엄OO 집사님의 장남 엄OO 올림 -


간병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공원을 러닝 할 때 아버지의 심정지 소식도 두 차례나 있었다. 그리고 러닝을 할 때도 병원에서 계속 걸려 왔던 전화. 그래서 그 트라우마로 다시는 그 공원에 가지 않고, 러닝이란 운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끔 지나가다가 공원의 모습만 봐도 숨이 너무 차오르기 때문에 힘들었다.


러닝은 과거 13년간 맛집 블로거로 활동 중 살이 쪘을 때 이를 빼기 위한 운동이었다. 1개월에서 2개월 사이에 총 3번, 매번 10kg씩 감량에 성공했다. 그때 러닝에 재미를 느껴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다른 운동으로 대체하면 되니까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가 있었다.

① 정신과 항우울제 약을 먹으며 이겨내는 방법

② 이미 트라우마가 된 러닝과 운동하던 공원에

스스로 노출하며 이겨내는 방법


사실 쉬운 건 1번이었다. 하지만 몸이 반응한 건 2번이었다. 항우울제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로 알고 있다. 혈중에 세로토닌이 있으면 기분 좋은 상태가 될 수 있는 원리라고 알고 있고, 억지로 호르몬을 조절할 필요까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닝을 하면 세로토닌, 엔도르핀, 엔도칸나비노이드, 하체 근력, 개운한 정신까지 얻을 수 있는데”라는 고민을 한동안 했었다.


문득 20대에 읽었던 책 글귀가 생각이 났다. 복서가 링 위에서 상대를 끌어안는 건, 상대와 거리를 벌리는 순간 펀치를 맞고 KO 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정면으로 끌어안는 거라고. 결국 나는 용기를 얻어 ‘정면 승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퇴근 후 버리려고 꺼내놓은 연두색 러닝화를 고쳐 묶고 공원에 갔다. 심장이 요동치고, 눈물이 흐르고, 다리도 미세하게 떨린다. 어차피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저녁이고, 어두워서 사람들은 내 얼굴을 자세히 보지도 못한다. 그렇게 울면서 달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공원과 러닝에 적응이 되는 걸 체감해 갔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 고통스럽고 힘겹게 느껴졌다.


이렇게 어둡고 처절한 시간을 지나오면서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결국 마라톤이었다. 처음 마라톤을 시작할 때는 단순히 체중 감량과 건강을 위한 운동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마라톤은 내 삶의 심장과도 같아졌다. 새벽 공원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혼자 달리는 동안 마음의 고요함과 힘을 되찾았다. 마라톤은 내게 끈기와 희망의 상징이 되었으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인생의 축소판 같았다. 부상과 치료로 멈추어야 했던 순간들조차, 마라톤이라는 여정 속에서 의미를 찾았다.


나는 더 이상 단순한 마라톤이 아닌, 삶의 고통과 희망,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치열한 과정임을 깨달았다. 달리면서 흘린 땀방울과 고통, 성취감은 내면 깊숙한 곳에 상처받은 영혼을 일부 씻어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이 만드는 파문처럼, 그 여정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퍼져나갔다.


이 이야기를 통해 나는 같은 어둠 속을 걷는 이들에게 작은 위로와 용기를 전하고 싶다. 절망이 깊고 길게 느껴져도, 한 걸음씩 나아가는 힘을 잃지 말라고. 마라톤의 끝에는 항상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고히 자기만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나는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며, 오늘도 조용히 발걸음을 내디딘다.


정면승부를 다짐하고 시행하며 너무 힘들었던 그 당시. 난 이미 이쁜 해를 맞이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