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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 Aug 27. 2020

날마다 좋은 하루 : 누구나 제 몫의 무게가 있다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_20대 유방암 환자의 세계여행_일상의 깨달음

 나는 그다지 자기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의견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세상을 흑 아니면 백으로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아프기 전의 나, 아픈 나. 여행 중인 나, 여행 중이 아닌 무기력한 나. 좋은 날, 좋지 않은 날. 하지만 정작 ‘그날’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여름날이었다.

 



유난히도 더운 날씨 탓에 냉면이 당겼다. 마침 주변에 불 냉면이 유명하다는 가게의 간판이 보였다. 복작거리는 냉면집구석에 앉아 ‘불은 보통 맵고 뜨거운 음식을 부르는 말 아닌가?' '불과 냉면이라. 참 안 어울린다.’ 따위의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금방 내 앞에도 커다란 냉면 그릇이 놓였다.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새빨간 소스가 잔뜩 뿌려진 냉면. 그야말로 시원했지만, 너무 매웠다.

나는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잘 못 먹는다. 항암치료 중에 엽기떡볶이를 조금 먹었다가 역류성 식도염을 얻은 적도 있다. 2주일 내내 오른쪽으로 누워 자며 고생을 해 놓고 또 매운 냉면을 먹으러 오다니. 냉면 한 젓가락에 물 한 컵을 번갈아 마시던 내 옆자리에 한 쌍의 남녀가 자리를 잡았다.


걱정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풋풋한 대학생들이었다. 데이트하나 보네, 조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요즘은 뭐 하고 지내.”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자리가 가까워서 들렸다.

 

“뇌출혈이었어.”

 

‘-었어.’라는 말이 너무 대수롭지 않게 들리는 바람에 자칫,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 버릴 뻔했다. 남자 맞은편에 앉은 여자의 두 눈이 주먹만 하게 커졌다. 꼭 불 냉면 그릇 위의 삶은 계란 반쪽 같았다.

남자는 군대 생활 중 갑자기 쓰러졌고 뇌출혈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큰 수술을 두 번 했는데 머리카락 덕분에 흉은 안 보이지, 하고 씩 웃는다.

 

힘들었겠다. 오빠. 이제 괜찮은 거야?”

불편한 거 없어. 약만 잘 먹으면 된대.”

약? 무슨 약 먹어?”

간질약.”

 

충격적이었다. 병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경험한 나였다.

하지만 남자는 속 사정을 알고 봐도 너무나 건강해 보였다. 키 180은 족히 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그는 어쩌면 살면서 건강 걱정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더는 엿듣기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냉면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서 식사를 마쳤다.


문 앞에서 살짝 뒤를 돌아보니 유리창 너머로 남녀는 냉면을 앞에 둔 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의 웃는 얼굴은 근심 한 점 없이 밝아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나는 마냥 ‘어리고 건강해서 좋겠다’라며 부러워했을 것이다. 그들의 사정은 알지 못한 채로.


현실과 SNS속 모습

비교적 젊은 나이에 큰 병을 앓고 난 후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 보이곤 했다.

그래서 항상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누곤 했는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 행복한 사람, 행복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남에 대하여 함부로 단정 짓는 것을 그만두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나도 꽤 인생 재밌게 사는 친구일 것이다. 생계를 위해 출근 중이거나, 시험을 준비하며 고뇌 중인 누군가가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스물여덟 살부터 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것. 여러 번 죽음을 생각했었다는 것. 매 순간 두려워하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제대로 말한 적이 없으므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누구나 제 몫의 무게가 있다는 것.


이 어렵고도 당연한 진리를 만난 곳은 마라케시도, 런던도, 바르셀로나도 아닌 동네의 허름한 냉면 집이었다. 비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20대 암환자의 삶과 여행을 다룬 에세이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는 각종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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