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4.01.26/금)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오늘은 아빠 돌아가시고 처음 정신과진료를 받는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얼마만이시죠?"
(그때 8일에 왔으니깐... 음)
"대충 저번에 며칠 일찍 오셨으니 날짜 맞춰오셨네요."
"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음....."
"아버님은 좀 어떠시고요?"
"잘 보내드리고 왔습니다"
"언제요? 며칠날이었죠?"
"1월 11일이요. 진료 다녀가고 얼마 안 되서예요"
"그래, 장례식은 어떻게 잘 치르셨고요?"
"네, 그때는 삼일장으로 치렀는데 무슨 정신이었는지, 어디서 힘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장례식까진 잘했습니다"
"그 이후로. 어떠세요?
"장례 후에는 정말 많이 아팠어요"
"온 식구들이 다 병이 나서 아직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고 있고요"
"한 십일은 아빠가 어디 가신거 같지도 않고, 어디 계신 거 같지도 않고 마음이 이상했어요"
"일부러 책만 읽고 글만 쓰고 그러다 뇌가 정지가 오면 멍한 상태가 한 오 분씩, 십 분씩 유지가 됐어요"
"수면제를 거의 먹어야 잘 수 있었고요. 10일쯤 되니깐 잠이 깨진 안 왔는데 의식이 돌아왔을 때 느껴지더라고요"
"아, 이제 아빠 없지"
"그 허탈한 마음을 잊으려고 공모전이며 다른 곳에 정신을 쏟으려고 좀 무리를 하고 있어요"
"약은요? 남아 있었고요?"
"아뇨. 장례식 끝나고 너무 힘들어서 세 번씩 먹었더니 금방 떨어져서요. 없으면 없는 데로 버텼습니다"
"아니, 왜 약이 없는데 안 오셨어요"
"와서 제정신으로 말하기가 힘들 거 같았고요. 좀 진정을 하고 와야 할 거 같아서요"
"마음대로 약을 세 번씩 막 먹다가 다 떨어지면 또 없으면 안 먹고.. 그러시면 안 된다니깐요"
"내가 저번에도 세게 얘기했고, 그 전번에도 굉장히 세게 얘기한 거 같은데.. 자꾸 삶의 끝에서 끝으로 시소를 타는 거 같아요"
"약도, 잠도, 글 쓰는 것도, 책 보는 것도 다 몰아서 막 이렇게 하면 안 된다니깐요"
(속으로... 저는 몸이 아프니 어쩔 수 없잖아요. 선생님. 컨디션 될 때라도 할 수밖에요. 이 얘기를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일상의 평균치를 가지고 가야 하는데 나를 너무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요"
(안 아프면 저도 그렇게 살고 싶죠.)
"그 어떤 상황도, 관계도, 입장도, 나보다 먼저일 수는 없어요"
"약도 본인 판단으로 늦게 오시고 이러면 안 되고요"
(아니 저번엔 두 번을 먹든 세 번을 먹든 알아서 하라고 하시고는..)
"내가 아프고 힘든 사람이니깐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게 반복하는 일이 가장우선이에요"
(엄청 짜증을 내시며..)
"네"
"지금은 매우 불안정하니깐 약은 십일 치만 드릴게요. 이 주치는 못 드리고요"
"제가 명절 주는 다 쉬니깐 그전에 오세요"
"선생님 저 매우 안정적으로 좋아지지 않았어요?"
"아, 물론 처음 왔을 때보단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불안정하세요"
"네, 이 주 후에 뵐게요"
"네. 안녕히 계세요"
난 또 진료가 끝나고 진액이 다 빠진 듯 기운이 없었다. 선생님은 백발에 톤이 좀 높고 말이 빠르고 환자보다 말이 많고 나에겐 짜증이 많으신 편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일부로 나의 맞춤용 진료였다니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됐다. 일부러 강하게 말씀하시는 거라니 원래 그런 분은 아니란 얘기 아닌가.
다행이었다. 난 울지 않고 차분하고 느리게 할 말을 하고 왔다. 속으로 같은 얘기를 또 하기 싫어 참았지만 매번 같은 얘기를 듣는 게 힘들긴 하다. 나는 눈물이 터져 감정이 주체가 안될까 봐 일부러 많이 늦게 왔다. 상담 때 그렇게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한 게 아니라 병원을 나오면서 그냥 쓰러질 거 같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오늘은 참 이성적으로 잘하고 왔다.
약을 타고 30분쯤 지나면 선생님 말씀은 갈라진 아스팔트에 비가 스며들듯 잘 스며든다. 문제는 30분 정도는 계속 화가 난다는 게 문제이다.
나는 그대로 낮은 톤으로 이야기하는데 선생님께서는 흥분하신 톤으로 말씀하시면서 나한테 매우 불안정하다니..
물론 전문가시니 맞는 말씀이겠으나 외관상으로는 입장이 바뀌었지 싶다.
누군가는 땅을 딛고 세상에 서고 싶고, 누군가는 하늘이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어 한다.
나는 둘 다 아니다.
나는 굳이 발을 붙이고 정차하고 싶지도 않고, 하늘에서 사람을 내려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시원한 한줄기 바람으로 스쳐 지나가고 싶다. 누군가에 땀을 식혀주고 숨이 되어 주는 바람이면 좋겠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에게 땅을 딛고 서라고 자꾸 호통하시는 거 같다. 그게 이번생을 사는 유일한 방법인가 보다. 그래서 나에게 발이 두 개 달려 있는데 나는 자꾸 망각한다.
내가 발이 없는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