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릎까지 닿았어요. 밤나무 알이 커지고 고슴도치같이 성난 밤송이가 짜부라져 툭툭 갈라져 나뒹구네요.
가는 길에 생각했어요.
"꽃이 참 크고 이쁘네"
"예전 같으면 다 찍었을 텐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너희도 시들 터, 나와 같겠지"
터벅터벅 볼일을 보고 오는 같은 길.
다시 마주한 파란 하늘, 그리고 그림 같은 가로등과 나뭇잎 사이 구름을 보며 걸음을 멈췄어요.
"심상이 관상이라 했지"
"나는 눈도 무뎌졌나 보다 , 마음이 무거우니 예쁜 걸 봐도 예쁘게 담을 수가 없네"
토요일 체육관에서 운동이 끝나고 회장님과 코치님과 30분 정도 얘기를 하다 왔어요.
(회장님)
내가 아침에 6시에 일어나거든, 그럼 배드민턴장 가서 12시까지 운동을 하고 점심에 집에 와서 정종 한잔하고 밥을 먹고 한숨 잔다고. 그리고 오후에 체육관 나오거나 볼일 보는 거야.
(코치님)
네..
(나)
너무 오래 운동하시는 거 아니에요?
(회장님)
아니, 예전에 내가 70살 넘은 노인들 라켓 드는 자세를 보고 나도 나이 들면 저럴까 싶었거든. 근데 내가 그들의 뒷모습을 닮아가고 있더라고. 아직은 내가 60 대니 깐 그렇지만,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미리 스트레칭하고 자세 연습하고 한 시간 정도 웨이트를 하는 거지
(나)
네..
(회장님)
민찬아 회원님 어제 몇 시간 잤는지 물어봐라?
(나)
저 8시 운동 끝나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9시에 자서, 오늘 1시에 일어나서, 당근하나 먹고, 샤워하고 2시부 운동 온 거죠.
(회장님)
민찬아 이게 말이 되니? 양띠시라는데 양띠도 많이 자긴 해. 근데 계산해 봐. 몇 시간을 잤나?
(코치님)
흐흐흐 그러게요. 많이 주무시네요.
(나)
제가 힘들다고 했잖아요. 맨날 웃고 있어도 진짜 모든 기를 다 쓰고 가는 거라니깐요. 회복해야 되니깐 가자마자 자는 거죠.
(회장님)
민찬아 회원님 겉은 아주 보기 좋잖아. 근데 속엔 근육은 하나도 없어. 우린 살만 만져봐도 알거든..
기술 진도를 나갈 때가 아니고, 기초 근력운동 위주로 더 힘들게 해야 해.
(코치님)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이 나이 되니깐, 어디 깊은 산에 가서 바위 밑에 집이나 짓고 사람 한 명 없는데 가서 살고 싶어. 삶에 아무 미련도 없고, 이젠 꿈도 없고, 정리할 날만 남은 거 같고, 뭘 시도하기조차 싫어.
(나)
회장님 전 영화에서 나오는 거처럼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썰물일 때 구덩이 파 들어가서 밀물일 때 침수돼서 사라지고 싶어요. 차에도 집에도 민박집에도 피해 안 주고 좋잖아요. 제 DNA도 못 찾게 흔적을 지우고 싶어요.
(회장님)
에이, 사십 대는 이르지
(나)
아녜요. 사십부터 지쳐요..
어머! 회장님 우리 이러면 안 돼요.
코치님 꿈도 있고 살 날이 더 많은데..
이런 건 전염돼요.
코치님 이십 대 시죠?
(코치님)
네. 결혼하면 좋지 않나요?
(나)
장단점이 있죠. 딱 결혼 전까지가 좋은 거 같아요. 흐흐흐
(회장님)
제 군대 가기 전에 여자친구 있었는데 군대간사이에 고무신 거꾸로 신었어. 우리가 엄청 밀어줬는데..
(나)
코치님 결혼 일찍 하실 거 같아요. 리드하는 여자만 생기면~
(코치님)
저요?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서요. 글쎄요..
회장님과 난 삶에 미련이 없다는 얘기를 30분이나 하고 헤어졌다. 그래서일까 분명히 하늘도 예쁜데 무뎌지고 그 좋아하는 햇빛이 비추는데 햇빛도 슬퍼 보였다. 어둠에 곧 가려질 테니깐..
내 마음에 든 우물이 깨끗해야 무얼 비춰도 그대로 비출수 있는데.
내 우물은 마르고 썩어가나 보다. 어서 빨리 장대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비가 넘치게 와서 내 썩은 물은 다 쏟아내고 깨끗한 물로 채웠으면..
약으로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