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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5년 기록

무기력을 보내는 법

오늘을 씁니다

by 이음

볕이 좋은 날이다.

햇살이 좋아 커튼을 치고 양쪽 베란다를 열었다. 바람을 초대하고, 햇살이 쉬다 가게 할 참이었다.


생각은 오늘 할 일들과 스케줄을 읊어대는데 마음이 풀썩 주저앉았다.


또 무례한 녀석이 노크도 없이 찾아와 버렸다. 내게 무례한 녀석은 무기력과 우울의 블랙홀이다. 순식간에 나의 세상을 흡입해 버리고 나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녀석. 나쁜 시키.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할 참이었다. 여름에 담가둔 오미자차도 우려 놓고 하교하면 시원하게 한잔 주려했다. 다시마된장 수육도 삶아놓고, 간단하게 파절이 조금 무치고, 들기름묶은지도 자박하게 조 참이었다.


이틀장본 음식도 요리해서 냉동실에 일주일 식량을 채워놔야 하는데..


이 녀석이 한 번에 날 눕혀버렸다.


아~

억울하고 아까운 시간..


할 일도 많은데 이럴 때마다 애를 엎어뜨려 놓고 일어서고 싶다. 어디에서 나를 조정하는지도 모르는 녀석을 이기기란 참 쉽지 않은 일.


일단 안정제를 하나 먹고 한 시간을 줄 테니 마실 다녀오라고 말했다. 말을 들을지 안들을지 모르지만 내가 선이고 갑인걸 인지 시켜줘야 한다.


이 녀석이 약 먹고 떠날 동안 어제 아들이 나한테 미쳤다고 한 얘길 적어봐야겠다.


"엄마 내일 과학 수행평가 있는데 긴장되고 스트레스받아"


"어? 그래?"

"앉아봐 아들"

"너랑 나랑 다른 사람이고, 자란 환경이나 기질 성격도 달라 그렇지?"


"응"

"근데?"


"엄마는 시험 볼 때 스트레스를 안 받아봐서 솔직히 이해를 잘 못해"


"왜 스트레스를 안 받아"


"그냥 원하는 점수를 정해두고 그만큼만 공부하고. 틀리면 그냥 틀렸구나.. 답이 이게 아니 었네하고 떡볶이 먹고 말아"

"내가 한 만큼만 점수가 나오는 거고, 한 만큼만 알 텐데 그걸 긴장하고 스트레스받으면 인생이 너무 무겁지 않을까?"

"너 과학 공부했어?"


"응, 당연히 했지"


"그럼 뭐가 걱정되는 거야?"


"내신에 들어가고, 생기부에 남으니깐"


"그렇구나. 엄마 말 들어 볼래?"


"응"


"엄마 손잡고 눈을 감아봐"


"응"


"엄마 말이 그림으로 그려지면 대답을 해줘"


"응"


"넌 지금 보다 키도 크고, 멋져진 마흔 살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집에는 아내가 저녁을 해놓고 예쁜 딸이 기다리고 있어. 이제 기분 좋게 퇴근할 시간이야"

"머릿속에 떠오르면 대답해 줄래?"


"응. 떠올라"


"지금 퇴근하는 길이야. 베스킨라빈스도 보이고, 치킨집도 보이네.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애기 아이스크림 사다 주고 싶어"

"나도 엄마처럼 나갔다 들어올 때 꼭 뭐 사다 줄 거야. 그거 엄청 기대되고 기분 좋거든"


"그렇지? 지금 너는 마흔 살이자나. 예쁜 아가도 있고. 집에선 맛있는 저녁을 가족끼리 먹을 거야."

"근데 지금도 중2 때 수행평가 긴장하고 스트레스받았던 게 기억나? 너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


"아니. 생각도 안 날 거 같아"


"좋아. 눈을 떠"


"그거야. 삶을 늘 잠자리처럼 앉을까 말까 조심스럽게 살지 말라는 거야. 그렇다고 두꺼비처럼 너무 느려서도 안 되겠지만. 적당히 딛고 뛸 만큼만 개구리처럼 적당히 가볍게 살아"

"시간은 계속 흘러. 이 시간에 너무 집중하면 숨차서 다음이 두려워져"


"엄마는 시험 때 1번만 다 찍은 적도 있어"


"아니 왜?"


"궁금해서. 우리 때는 답이 1번 아니면 3번이라는 말이 많았거든. 선생님들이 의도한 건지, 아님 우연인지, 헛소문인지 궁금해서 시도해 본거지"


"헐, 너무 무지한 거 아냐?"


"아니, 난 좋은 추억이었어"


"안 혼났어?"


"혼났지. 교무실에 불려 갔지. 우리 때는 거의 매일시험이었어. 그중에 한 번은 나도 시험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거잖아?"


"맞았지?"


"아니.. 크크, 엄만 모범생이라 안 맞았지. 대신 물어보셨어 왜 그랬냐고"


"그래서?"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지, 궁금해서 그랬다고"


"헐 그래서?"


"선생님이 이노무시키하시면서 딱밤 때리고, 교무실 뒤에서 재시험 봤지"


"안 무서웠어?"


"응. 엄만 어차피 반장이고 방송반이라 교무실이 교실 같았거든"

"학생이 궁금할 수 있는 거잖아"

"시험 두 번 봤으니 반성한 거고.."


"크크 엄만 역시 미쳤어~"


"헐~ 아들시키가 엄한티 미쳤다니, 이런 상다리 눔어트릴 시키"


"애기야, 인생 너무 숨 막히게 살지 마, 하고 싶은 거하고, 실수도하고, 더러 빵점도 맞고 그래. 내신, 생기부 너무 신경 쓰지 마. 우린 유전자가 빨간 글씨 적힐 유전자가 아냐. 그거면 됐지. 올 때 빵빠레도 사 먹으면서 빵점을 즐기는 배포도 키워"


"다 잘할 필요 없어. 어떻게든 먹고살다, 다 똑같이 죽어. 넌 너만의 장점이 많잖아"

"조금 부족하면 부족한 데로 살면 돼, 다 갖추고 산다고 더 행복한 것도 아니야"


"엄마가 사차원이라서 너 못해주고 키우는 거 있어? 없잖아. 넌 엄마보다 장점이 많아서 더 잘할 거야"

"설사 엄마보다 못해도 돼. 엄마가 워낙 훌륭하시니 못해도 중간은 가~ 크크크"


"아, 미쳐. 엄만 항상 시작은 탈무드 같다가 끝은 또라이야"

"엄마는 사이비 종교 교주를 했어야 해"


"글치,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번생은 인성이 그거에 못 미쳐. 네가 해보는 건 어때? 넌 엄마보다 잘할 수 있을 거야"


"뭐래. 자식한테 사이비종교 교주하래"


"말이 그렇다고, 얽매이지 말라고.. 바람처럼 불고, 물처럼 흐르라고. 어디에 부딪혀도 유연해지게"

"그래야 니 삶이 덜 힘들어"


"알았어. 낼 시험 한 만큼만 보고 올게"

"그려. 올 때 빵빠레 꼭 사 먹어"

"루틴을 만들어야 해. 비우는 루틴. 진지함 뒤에 달콤한 가벼움으로 보상해 줘"


"알겠어. 크. 역시 우리 엄만 10차원이야~"


"헐 넌 단군시대거든. 애 늙은이야.."


한참 떠들고 우린 아끼는 초콜릿을 반 나눠 먹었다. 진지함 뒤엔 항상 달콤함으로 뇌를 정화시켜줘야 한다.


난 진지한 성격인데 진지하진 않다. 무슨 멍멍이 소리 같냐고 하겠지만..


그냥 대충 (유튜브 쇼츠) 파키스탄 형님들처럼 상황에 맞춰 때우고, 자르고, 붙여산다. 요리에 모든 재료가 갖춰줘야 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재료로도 충분하다.


삶에 진지해야 할 때는 몇 순간 안된다.


나의 내면을 만날 때..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해낼 때..

타인을 존중할 때..

부도덕한 강자를 만날 때..


이때 말고는 난 클럽에 간 낙지마냐 꾸물텅 살아간다. 갯벌이 다 내 집인 마냥!


둠칫듬칫~


자, 이제 한 시간 됐다.

무례한 놈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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