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잘 알겠지만, 이렇게 나를 분리해서 너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인 것 같아.
근데 신기하네. 한 발 물러서서 보니 네가 더 선명히 보여. 내가 나에게 글을 쓰려고 하니 갑자기 울컥한다.
지금부터 내가 널 보여줄 테니 거울이라고 생각하고 잘 봐봐.
넌 모든 순간을 에둘러 산다고 생각하지 않니?
다른 사람은 엄청 걱정하면서 너의 인생은 어디 있어?
넌 정말 의무와 책임으로만 살고 있어. 그래서 네가 많이 아픈 거야. 넌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아. 모든 주파수가 현실을 지키는 타인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자식, 남편, 자매, 시댁, 친구... 다 타인이야. 너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없어.
넌 매일을 참아. 모든 걸 참으면서 그걸 당연시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그러고 넌 '어차피 죽는 거 내가 더 내어주면 어떠냐'라고 나를 타이르지? 근데 난 그러면 다치고 아파.
넌 순간의 너일지 모르지만 난 너의 오늘이 쌓여 내가 된 거니까.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왜 그렇게 누구의 무엇으로만 사는지, 너의 선택이라고 책임으로만 버티는지. 근데 그거 이제 그만해도 돼.
너의 엄마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게 너의 탓이 아니잖아?
아버지의 부족했던 보육이 너의 잘못이 아니잖아?
네가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다 완벽히 해낼 수는 없어.
그걸 해내기 위해 모든 걸 참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아픈 거야.
네가 자랄 때 받은 아픔을 다른 사람이 받는 걸 못 보겠지? 어린 너가 도움의 손길이 간절했던 고통이 타인의 고통까지 너와 동일시되는 거지.
근데 네가 그런다고 그들의 삶을 달리 해줄 수 없어.
잘 알잖아. 넌 너의 시간만 살 수 있어.
너와 나의 아들... 그 애는 너보다 좋은 부모 밑에서 많은 지원과 사랑을 받고 자라고 있어. 지금도 충분히 말이야. 왜 항상 죄책감으로 살아? 모든 걸 최선으로 할 순 없어. 너무 좋은 부모가 되려 애쓰지 않아도 돼.
넌 마치 경주마 같은 거 알아? 양쪽 눈을 가리고 앞만 보고 승부를 보고 있어. 너의 내면은 경주마로 사는 너이고, 너의 외면은 널 멈추게 해야 한다는 걸 아는 덜렁이야. 그래서 넌 헷갈릴 거야. 너는 네가 털털하고 대충 사는 것 같지만 아니야.
너의 지금을 이끄는 자아는 누구지? 너의 내면이야.
넌 애써 외면이랑 살고 있다고 위안을 삼지만 그건 왜곡이고 혼돈이야.
난 너의 영혼이잖아. 너의 내면과 외면의 합이야.
그러니 널 전체적으로 볼 수 있어.
이젠 널 좀 봐봐.
이젠 하고 싶은 말 하고 살아도 돼.
누구의 누굴 위해서 가장 많이 참는 건 너야.
네 진심을 말해 볼까?
넌 지금 많이 지치고 힘들지?
누구의 무엇으로 사는 게 이젠 숨 막히게 답답하지.
주변 사람을 바꿀 수 없으니 너를 바꾸는 거 알아.
근데 그게 참는 것으로만 바꾸진 않아도 돼.
이젠 말하고 너를 지키며 살아.
아이가 상처받을까 참지 말고 말이야.
어쩌면 그게 너의 아이에게 더 큰 상처일 수 있어.
알아. 벌거벗은 것처럼 삶의 희로애락을 다 퍼트리고 살 순 없는 거. 그래도 말이야. 아프면 방문 닫고 이를 악물고 울다 지쳐 잠들지 말고 소리 내서 울어도 돼.
가족들이 힘들까 봐 하루 종일 굶지 말고 죽 끓여달라고 해도 돼. 너도 그렇게 살아. 너 자신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
자매들 사이에서 어찌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사람의 관계란 다 각자의 몫이야.
더 이상은 시댁의 폭력을 참지 마. 내가 너무 많이 다쳤어. 넌 참아줄 의무도 없고 며느리란 명칭이 낙인이 아니야. 그 누구도 너에게 함부로 하게 방치하지 마.
널 지킬 사람은 너밖에 없어.
당당히 말하고 당당히 살아. 너의 아이가 배워.
고통받는 엄마를 보면 아이도 힘들 거야.
넌 다 네 선택이라고 죽을힘으로 네 어깨에 다 짊어지고 가는데 선택은 잘못할 수도 있고, 책임을 때론 못 질 수도 있어. 네 책임이 아닌 것까지 누구의 무엇으로 다 끌어안지 마.
네가 정말 너의 아이가 더 많이 아프지 않길 바란다면
괜찮은 척하는 너를 내려놔. 그래야 아이도 너처럼 속으로 참지 않을 거야.
너의 시간이 이제 갈림길에 선 것 같아.
이대로 의무로만 살면 넌 이제 얼마 못 버텨. 제발 너로 살길 바래. 그래야 너의 오늘이 계속될 수 있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야. 그건 너의 아버지가 세상에 손해 보고 사는 걸 네가 배운 거야. 넌 이제 성인이고 달리 살 수 있어.
어때? 이젠 네가 좀 보이니?
네가 아직 더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왔어.
세상에 선과 악에 너무 집착하지 마. 넌 선이어도 너고, 악이어도 너니까. 네 말처럼 선으로 살아도 흙이 되고, 악으로 살아도 흙이 되잖아.
난 네가 많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만약 지금 죽을 것 같이 아프다면 아프다고 울어.
억울하면 억울하다고 말하고, 미안한 건 미안하다고 말하고, 사랑하는 건 사랑한다고 말해. 그렇게 너의 오늘을 쌓아야 내가 건강히 살 수 있어.
착한 아이 소리를 40년 넘게 듣고 자랐으니 오래 걸릴 거야. 조급해 말고 슬슬 설설 조금씩 풀다가 뭔지 모르겠을 땐 뭉텅뭉텅 쏟아내.
네가 가족을 지켜온 그 힘으로 이제는 널 지키면 돼.
내가 점점 희미해져 가.
제발 날 놓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