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통
<갯 민숭이 달팽이의 고진감래>
조선일보 사이버 샷에서 기사를 봤다. 갯 민숭이 달팽이는 바다가 서식지이다. 물벼룩에 감염된 달팽이는 스스로 머리와 몸을 잘라 기생충을 없앤다고 한다. 온몸에 소화샘이 흩어져 있어 머리만으로도 해초를 먹고 노폐물을 배출한다고 한다. 3주 정도가 지나면 심장을 포함한 몸통이 다시 재생된다고 했다.
이 기사를 보고 나는 독수리가 생각났다. 검은 독수리는 80년 정도 사는 장수 동물이다. 40년 정도 살았을 때 극도의 변태를 해야만 삶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한다.
부리와 발톱과 털이 노화되어 갈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부리를 바위에 부딪쳐 깨고 나면 다시 새부리가 자란다. 새로 나온 부리로 발톱을 뽑아내고 나면 새 발톱이 나오고, 새 발톱으로 길고 무거운 털을 하나씩 뽑아내고 나면 새털이 자란다. 새로운 몸으로 바뀌기 위해 독수리는 배고프고 유약한 시간을 버텨 내야만 한다. 피투성이 몸을 반복해가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다.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는 대가는 늘 고통스럽고 견딤의 시간이 필요하다.
갯 민숭이 달팽이도 독수리도 사람과 똑같구나 싶어 처연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도 자기 팔다리를 잘라내듯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만 성취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능을 위해 달리는 아이들은 학창 시절을 모두 잘라내고 산다. 취업 경쟁에 내몰리는 청년들은 온갖 스펙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자녀를 교육하고 부모의 노후를 책임지는 중년들은 끝이 없는 책임에 지쳐가고 있다. 내 목을 쳐야만 살아내는 달팽이와 같다. 내 부리를 내가 깨야 하는 독수리와도 같다.
내 시간을 삶의 목표와 바꿔야만 새로운 삶이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람과 같다.
나는 내가 지킨다.
나는 내가 키운다.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세상은 가르친다.
맞는 말인데도 가끔은 이 말이 슬프게 들린다.
때론 숨고 싶고, 때론 멈추고 싶은 사람도 있지 않을까? 우리의 유약한 시간을 보듬어 주는 곳은 어디 없을까? 이런 내몰림은 자살을 부추기고 공황장애를 유발한다. 사회에 구석으로 몰려 일어나는 절망의 병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람마다 짊어지고 갈 수 있는 무게는 확연히 다르다. 개미들도 분야가 따로 있다. 병정개미는 일개미보다 전투력이 세배나 된다. 그래서 개미제국을 지키고 보호한다. 일개미는 자기 몸의 수십 배 정도를 든다고 한다. 집단을 먹여 살리고 개체의 번식을 돕는다.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많이 다를 것인가?
어떤 사람은 내 몸에 상처가 제일 아프다.
또 어떤 사람은 타인을 위해 내 목숨을 내놓는다.
코로나에 의료진을 자처해 민간의 안정을 먼저 살피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강요받고 억압받을 때 사람들은 지치고 절망하게 되는 것 같다.
성인이라 달라진 건 몸 밖에 없다. 몸과 정신의 성장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너무 많은 책임을 개인에게 짊어지게 하는 때가 있다.
성인이니깐.
당신의 자식이니깐.
성인은 무조건 결혼을 해서 국가의 미래를 보장하는 자녀를 낳아야 할까? 장애인을 낳았다는 이유로 편애받고 부모만이 평생을 희생하며 자녀의 생존과 건강을 책임져야 할까? 공동체 의식으로 가져야 할 의식들이 소멸되고 있다.
주변을 돌아보는 일.
관념을 정제하는 일.
사람을 탓하지 않는 일.
무엇이 우리 사회에 왜곡된 희생을 부추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서로의 안녕과 평안을 바라는 마음을 비슷할 텐데 말이다. 우리는 조금 다르게 살 수 있다. 갯 민숭이 달팽이처럼 나를 잘라내지 않고도 서로를 도울 수 있다. 독수리처럼 내부리를 잘라내지 않고도 서로의 부리를 깨 줄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나의 안전이 사회의 안전이며 당신의 평온이 나의 안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