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달 가족의 해풍소
어제 남편은 종일 화가 나 있었다.
대보름이라 시댁에 가야 하는데 내가 아팠기 때문이다. 희한하게 남편은 나 없이 시댁을 잘 안 가려든다. 본인가족인데도 본인도 어려운 분위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숨도 잘 못 쉬는 내가 가서 방실방실 웃으며 밥 차리고 분위기 메이커가 될 상황도 아니었다. 가기로 해놓고 남편마저 안 가면 그 노여움은 오로지 나의 몫이 되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가라 했다. 그러니 그 짜증을 남편은 참지 못하는 것이다. 아침부터 감정조절을 못하길래 얼른 조울증약을 먹으라 했더니 먹기 싫다고 한다. 이젠 약도 안 먹고 정신과 치료도 안 받는다고 하는데 내 숨이 턱 막혔다. 그 널뛰는 감정 기복을 다시 아들과 내가 받아줘야 한단 말인가? 스트레스를 꼭 집에 와서 가족에게 푸는 당신을 우린 너무 감당하기 힘들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도 식구들에게 짜증 한번 안 내는 게 너무 당연한 당신에게 서운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남편이 말했다.
"엄마 다리 병원 가봐야 할거 같아. 너무 많이 부었어"
"왜? 어디가 아프신데? 혹시 당뇨발이신가?"
"아냐. 이제 당뇨 없으시데"
"그럼 얼른 가보시지?"
"동두천에 마땅한 병원이 없데"
"응"
"당신 다니던 병원 가시자 했어"
"그래? 우리 집에 오신다고?"
"응. 근데 이번 주 치과도 가야 하고. 안과도 가야 해서 안되신대. 담주나 모시러 가야지"
"그래"
이렇게 아버님 보청기까지 얘길 하다가 내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누워서 생각해 보니 지금 아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오시는 걸 별로 안 좋아했다.
아들은 사춘기에다 학폭사건으로 마음이 힘든 시기인데 '자꾸 때려버리지 그랬냐'며 그 얘기를 꺼내시기도 하고, 아무래도 오시면 자기 방을 내드려야 하니 더 그렇다.
아버님은 껌 씹으면 똥꼬 막힌다고 잔소리하시는 걱정인형이시라 하루종일 말이 많으시다. 시어머니는 하루종일 나를 따라다니며 이야길 하시니 집이 조용할 틈이 없고 내가 누울 새가 없다. 시어머니야 얘기할 사람이 없다가 우리 집에선 내가 들어 드리니 할 말이 많으실 거다. 그리고 애기는 엄마가 아픈데 저번에도 할머니 할아버지 챙겨드렸던걸 싫어했다. 아무래도 일주일 안에 오실 거 같아서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얘기를 했다.
"애기야 아빠가 할머니댁 다녀왔잖아. 할머니가 다리가 많이 부으셨데. 그래서 다리 검사받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 우리 집에서 하셔야 한다네. 조만간 일주일 안에 오실 거 같아"
"아.. 왜 또 우리 집이야?"
"응. 동두천은 적당한 병원이 없데"
"아니 안과도 치과도 다 서울로 잘만 다니시면서 왜 다리수술은 우리 집으로 와서 하셔? 눈 수술 하셨을 때도 우리 집으로 모셔서 엄마가 일다니며 병간호 다 했잖아. 점심까지 차려놓고 출근하고. 지금은 그걸 누가 다 해?"
"엄마가 해야지"
"아니 그러니깐. 엄마가 아픈데 참고했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가시고 나서 훨씬 많이 아플 테니깐?"
"그 후폭풍이 더 크잖아. 그리고 우리 서울 살 때야 집도 더 크고 방도 많고 엄마가 돈도 잘 벌었지. 지금은 아니잖아. 난 못해. 엄마 심부름은 해도 할머니 할아버지 심부름까진 못해. 할아버지 물도 안 떠드시는데 그걸 어떻게 해. 맨날 물도 미지근한 숭늉만 드시고, 수건까지 다 챙겨드려야 하는데. 밥 드시지. 간식 드시지. 야식 드시지. 밤에 술 드시지. 그걸 어떻게 하려고 엄마가"
"아 내가 아빠한테 말할래. 안된다고. 고모는 왜 같이 살면서 할머니 할아버지 아플 때만 우리 집으로 보내? 난 화가 나 엄마"
"알았어. 엄마가 아빠한테 병간호할 사람이 없는데 어떡하냐고 말해볼게"
휴..
생각해 보니 아들 말이 맞았다. 내가 아프단 걸 까먹고, 그저 시어머니 아프시단 상황만 생각했었다.
"여보. 어머니 아버지 오시면 병간호를 해야 할 텐데.. 할 사람이 없잖아? 당신은 일 가야 하고. 나는 화장실도 겨우 가잖아. 전에는 내가 안 아팠으니 일다니면서도 병간호하고 병원 모시고 다녔는데. 지금은 그걸 누가 해? 아버님은 물도 혼자 안 떠드시는데.. 그 수중을 누가 다 들어?"
"알았어. 그럼 당신 낫거든 오시라 할게"
여기서 마음이 확 상했다.
나 같으면 우리 아빠 수술해서 우리 집으로 모실테니 당신이 병간호하고 엄마 물시중까지 들라고 못했을 거다.
그것도 4년이 넘게 아픈 사람이 낫자마자 시부모님 병시중을 들으라는 말을 어쩜 저렇게 당연하게 하는 걸까? 내게 부탁하거나,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놀라서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침묵을 깨고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럼 전화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간호할 사람이 없어서 우리 집에서 수술하시기 힘들다고"
"아냐. 그냥 내가 모시러 갈 시간 안된다고 하면 돼"
흠. 나랑 너무 마음이 안 맞는다.
시부모님은 항상 모시러 가고 모셔다 드려야 한다. 자기가 오시라 했으니 시간을 비우셨을 텐데..
막상 오신다고 하면 모시러 갈 시간이 없다면 분명 오해하실 거다.
앞뒤상황 설명을 못 들으셨으니 또 며느리가 죄인이 된다. 지금까지도 난 중간에서 내가 하지 않은 일로 계속 죄인이 되었었다. 물론 이번엔 나 때문인 건 맞지만 내가 지금 병간호를 할 몸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남편도 시어머니도 그냥 다음 주로 정해 버린 건 나에 대한 예의가 없다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시누이는 당신 부모님 병간호를 왜 못하는가? 친딸인데..
시부모님은 왜 친딸에겐 병간호해 달라고 못하는가?
아들 얘길 듣고 보니 나도 화가 났었는데 참았었다. 근데 남편이 내가 나으면 모시고 온다는 말에 순간 말을 잃었었다.
우리는 다 늙는다. 나이가 들면 자식이든 가족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당연히 며느리도 자식이니 병간호해 드릴 수 있다.
근데 딸은 겁 많아서 상처도 못 본다고 병간호 못한다 하고. 아들은 일한다고 못하고.
그럼 나는?
나도 어머니 눈수술하셔서 한 달 넘게 와계셨을 때, 나도 바빴다. 그때도 나만 병시중 들고 나만 조퇴하고 병원 모시고 다녔다. 왜 그럴 때는 며느리가 편하고.. 조금만 기분이 상하시면 아들이 잘못한 것도 다 며느리 때문인가?
한국의 시댁 문화 속엔 며느리의 희생을 강요하는 세습이 싫다. 남편과 시누이 시부모님들의 잘못된 생각들이 날 병들게 한다.
잘하고 싶다가도 이럴 땐 정말 서운하다.
왜 정작 움직여야 할 내 의견은 묻지 않는 건가?
미안한 마음으로 물어만 봤어도, 내 몸보다 시부모님을 더 챙겼을 나인데..
오늘 남편 많이 시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