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이어달리기

수필통

by 이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브런치 글을 읽다보면 슬픔이 이어달리기처럼 오는 사람들의 글을 마주할 수 있다. 그 많은 사건과 상황 중에 왜 하필 슬픈 일일까. 누구의 슬픔이 한데 모여 한 사람에게 집중돼 쏟아지는 걸까. 뭐 좋은 일이라고 경주라도 하듯 슬픔을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이의 글에서는 갑작스러운 이별 이야기가, 또 다른 이의 글에서는 병으로 무너져 내린 일상이 등장한다. 다르지만 닮아 있는 사연들이 모여 읽는 나에게도 알 수 없는 무게를 얹어놓는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눈물이 한 길로 흘러 모여드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이 많은 글 속에서 나는 왜 슬픔을 먼저 마주하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이 고개를 든다. 아마도 기쁨은 짧은 찰나에 반짝이며 지나가지만 슬픔은 오래도록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글로 남기기보다는 슬픔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상처를 기록하며 살아남으려 한다.

나는 그것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슬픔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서로를 연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글 속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 나는 낯선 사람과도 한순간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기묘한 위로를 느낀다.

어쩌면 슬픔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이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달리기를 하듯 앞선 이가 바통을 쥐여줄 때 우리는 그 무게를 잠시 대신 들어주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돌고 돌아 언젠가 내 슬픔도 누군가의 손에서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읽고 쓰며 알게 모르게 바통을 건네받는다. 그 순간만큼은 나만 아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내 눈물이 고립된 웅덩이가 아니라, 어디선가 또 다른 눈물과 합쳐져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버티게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슬픔을 나눈다고 해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맞다. 눈물의 양은 줄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무게는 달라진다. 나 혼자 들던 짐을 함께 나눌때, 발걸음은 훨씬 덜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쓴다. 누군가는 고백하듯, 또 누군가는 절규하듯. 글은 결국 마음의 언어이기에, 슬픔은 글이 되어 우리 앞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대답한다. “나도 알아. 나도 거기 있었어.”

어쩌면 이 이어달리기는 끝이 없는 경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끝없음 속에 삶이 있다. 누군가는 쓰러지듯 멈추고, 또 누군가는 다시 힘겹게 뛰어오르며, 바통은 이어진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슬픔을 나르며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바란다. 내 글 또한 누군가의 손에 닿아 잠시 그들의 어둠을 덜어주기를. 슬픔의 이어달리기 끝에서, 우리가 결국 마주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마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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