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울을 고백합니다

수필통

by 이음


나는 자살 생존자이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질병으로 가까운 이들을 일찍 떠나보냈고, 자라면서는 유독 소중한 사람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기저 가장 깊은 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음울함이 늘 고여 있었다.

우연히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시기와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시기는 거의 비슷했다.
글쓰기는 내게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글이 있었기에 나는 간신히 살아 있었다.

그 무렵,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나 같은 아픈 사람들에게
우울증을 현실적으로, 있는 그대로 해석해주는 책을 쓰고 싶다고 말이다.

그 책의 실험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아픈 순간에도,
흔들리는 날에도 가능한 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업을 아직도 ‘진행 중’이다.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쓰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울의 농도와 상황의 폭이 너무 넓고 깊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둠에서 겨우 헤어나온 내가
다시 그 시절의 글을 들여다보면
당시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그때의 어둠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어둠의 글은
읽는 이의 마음만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이의 뼈까지 부셔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각했다.
과연 이 책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써야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을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오늘, 나는 정말 많이도 울었다.
최근에 다시 펼쳐본 『널 보낼 용기』가
내 속을 긁어내듯 울음을 쏟게 했다.

글이 아파서도 울었고,
그 글이 나의 오래된 그림자를 다시 드러내서도 울었다.

나는 겉으로 보면 밝고 외향적이며 사교적인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잘 웃고, 잘 떠든다.

하지만 내 안은 오래전부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죽는 방법을 찾아다닌 적도 있고,
약을 구하는 방법을 검색한 적도 있었다.
불 꺼진 이불 속에서 숨조차 못 쉬고 울던 밤들,
자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 깊은 내면의 심연이
다시 들춰졌다.

그런 경험들 때문인지,
내가 살아온 세상은 늘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일반 세상’과 ‘정신질환자들의 세상’.

그리고 나는 그 두 세계를 동시에 밟고 살아야 했다.
한쪽은 밝음과 일상,
다른 한쪽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의 쓰나미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정신질환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이다.
겉으로 보면 단지 예민하거나 약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정신질환은
뇌에서 감정과 사고를 조절하는
신경 회로와 호르몬 체계가 균형을 잃으면서 생기는 질병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기능이 흔들리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얼마나 이야기해야
세상이 귀를 기울여 줄지 가끔 생각한다.

나는 예민한 사람도, 부정적인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의 눈빛은 어느새
나를 향해 다른 렌즈를 씌운다.

억울해도 소용없다.
아픈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세상에서는
설명보다 낙인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너는 예민해서 그래”
“생각을 바꿔봐”
“긍정적으로 생각해”

이런 말들은
정신질환의 존재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시선에서 나온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들을 가까이서 보면 안다.
그들이 겉으로 밝고 사교적인 사람들이 더 많다. 이유는
아픔을 감추는 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
마지막 힘을 짜내 웃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쉽게 던지는 이런 말들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픈 사람들을 더 깊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다.

세상이 규정하려는 ‘정상’이라는 이름이
어떤 이들에게는 칼처럼 다가온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전히 이 길 위에 있다.
완전히 나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완벽히 무너지지도 않은 채,
그 두 지점 사이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지나온 어둠과 쓰러졌던 자리들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

그래서 나는 오늘도 또 한 줄을 쓴다.
나를 구하기 위해 시작한 글이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숨구멍이 되기를 바라며.


나는 오늘도 당신이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