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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Apr 22. 2021

뱀도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끌려온 건가?

수달 가족의 해풍소

호주 시드니의 한 대형마트에서 양상추를 구매했더니

봉지 안에 뱀이 들어 있었다는 기사를 봤다. 뱀은 동물보호단체에 도움을 받아 야생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고는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다. 우연히 일어나기에는 좀 황당하고 희박한 일이다. 달팽이나 개구리 정도면 이해가 될 텐데, 독사가 양상추에 따라왔다고 하니 신기했다.


만약 나라면  생경한 상황에 놀라웠을 것 같다. 나는 이래서 세계 뉴스 기사를 보는 걸 좋아한다. 전 세계의 신기한 기사를 보고 있으면 생각의 창이 태평양까지 열려 있는 기분이다. 특히 세계 뉴스는 이슈를 주로 다루다 보니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건과 쟁점들이 주를 이룬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 학살 기사가 계속 올라왔다. 이런 기사를 보면 잠시 호흡이 느려진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리고 나에겐 어찌할 힘도 없다.


우리나라 광주 민주화 운동 때와 다를 바 없어 남일 같지 않고 맘이 쓰이지만 맘뿐이라는 미안함만 남는다. 민주화로 나아가는 진통이 그들에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도 그랬다. 억울하고 한 많은 목숨들이 희생됐다. 선조들에 희생과 정신이 우리에게 평등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책임감을 느끼고 행동해야 하지만 망각하고 현실에 엉켜 살게 될 때가 많다.

당장 나의 가족의 생계와 나의 가족의 안녕이 먼저인 나는 이기적 현대인이다.


누군가는 나 외의 것을, 나와 가족의 희생을 걸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싸우지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한 명의 성인으로 산다는 일이 맘처럼 쉽지가 않다. 가족을 지키고 자녀의 우산이 되어 주는 일이 그렇다. 나에게도 한 번뿐인 삶이다. 나의 삶을 살고 싶지만 꿈만 꾸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이가 물어보면 대답하기 힘든 일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해야 할까? 아님 내가 우선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우라고 하기 힘들다. 아니 솔직히 그러지 않길 바란다. 나는 아이가 편안하고 평범하게 섞여 살았으면 좋겠다.


회사 다닐 때 같이 입사해 첫 출근을 한 직원이 있었다. 나이도 같고 같이 면접을 봐서 금세 친해졌다. 사장님이 이력서에는 할 수 있다고 쓰고 실무를 못한다고 첫날부터 육두문자를 쓰고 손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고 대신 싸워주고 손을 잡고 나왔다. 젊은 혈기에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료의  인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틀렸었다. 나에게는 이력서만 넣으면 들어갈 수 있는 게 회사라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생계였다. 꼭 그 회사에서 버텨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같이 실업자가 되었지만 나는 죄인이었다. 내가 바르게 산다고 생각했던 게 상대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상대의 입장에 서 보면 정의 또한 다를 수 있다.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가 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정치인은 안됐으면 좋겠다. ‘사’ 자 들어가는 직업들.. 변호사, 검사, 판사, 회계사, 세무사, 의사, 약사는 안되면 엄마가 고맙겠다. 아픈 일 보고 아픈 얘기 듣는 일 말고도 사람 사는 세상 필요한 일이 많다. 그러니 너 좋은 거 하면서 평범히 살면 좋겠다. 좋은 거 없으면 아무거나 하면서 니 밥벌이하며 가족 지키고 살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고 내내 신경이 쓰였다. 미래 직업이나 학업에 관여 안 하기로 한 내 교육관을 빗나갔다. 그래도 그 말이 꼭 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을 구매할 때는 정의에 답을 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정답이 아닌 각자의 사고를 요하는 책이었다 비판적 사고와 통념을 깨는 사고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요즘 아들이 자주 선과 악에 대해 얘기를 꺼낸다. 벌써 그런 걸 생각하는 게 기특하고 고맙지만 사고가 부족한 엄마는 난감하고 불편한 마음이다. 정의시켜 전하고 싶지 않지만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흑백 논리로 말하는 나를 보고 답답한 마음이 든다. 잘 가르치려면 아님 잘 소통하려면 생각의 틀이 넓어야 하는데 소화시키지 못한 생각을 전하는데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어른들이 옛날부터 ‘책을 읽어라. 견문을 넓혀라. 사고를 크게 해라’ 하셨나 보다. 틀이 좁으니 한계가 있고 전달력이 부족하다. 미얀마의 군부독재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특정 집단의 우월주의와 이익을 내려놓지 못해 누군가의 피와 눈물로 달력을 넘겨가고 있다. 뉴스를 보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만약 우리나라가 저런 상황이면 내가 어떡할 거 같아? “

“응 글쎄 모르겠는데!! 아들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

“나도 나가 싸울 거야~ 저게 말이나 돼?”

“무슨 권리로 저 어린애들한테 폭력을 휘둘러?”

“저 나라는 인권도 없고 자유도 없나 봐. 누군가는 나가 싸워야 우리나라 같은 민주주의가 자리 잡지”


휴~

맞는 말인데 대답을 못했다. 말이라도 네가 맞다고 하기 싫었다. 말 조차도 진실이 될까 두려웠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님은 그렇게 대담하시고 훌륭하셨다’ 하지만 나는 쫄보 엄마였다. 내 아들만큼은 그리 훌륭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짐을 자식에 어깨로 받아내지 않길 바란다. 너 아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게 진심이다. 자식의 우주에는 고요만 깃들길 바란다.


사람마다 자신의 우주 안에서 다른 상황을 겪으며 시간이 흐른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혹독한 겨울이고 누군가에게는 봄날에 향연 같다. 불규칙하고 불평등하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삶이라고 어떤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 우주는 너무 원대해서 때론 버겁고 숨이 막힌다. 그래도 우주는 공전하기 때문에 상황은 바뀌고 숨통은 열리게 되어 있다. 절망의 끝에서 태양을 보길 바란다. 나와 당신의 삶에 공전에 희망을 믿길 바란다. 그게 살아갈 또 하나의 빛이 되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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