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1.31/화)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불편함을 마주하는 습관을 쌓아야 한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하니, 나에게도 솟아날 구멍이 생길 줄 알았다. 그 결과 나의 삶은 긍정을 넘어 이상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착각으로 길들여졌다. 며칠 전 상담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진중하게 받아들였다. 현실을 직면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말이었다.


<며칠 전 상담 내용>


“사람은 두 종류가 있어요"

“컵에 물이 반컵이 들어 있다고 해봐요”

“부정적인 사람은 '반 밖에 없잖아'라고 말할 거고요"

“긍정적인 사람은 '반이나 들어 있네'라고 말하겠죠 “

“환자분은 '물이 반이나 있으니 아껴 마시 고 다른 사람도 나눠 줄 수 있겠어'하는 유 형이에요"

“다시 말해 이런 건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 에요"

“희망의 값과 현실의 값을 동일시하는 사람이에요"

“생각에는 물이 많으니 나도 마시고 나눠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정작 물은 반컵뿐이니 나눠주고 나 면 내가 마실 물이 없겠죠?"

“생각이 희망이라면 현실과의 괴리감이 생 기겠죠? 그러면 그 부분은 본인의 겪어야 하는 몫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건이 있거나, 해결할 일이 있을 때 도.. 인간은 자신을 먼저 지키는 이기적인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먼저 지키고 주변을 돌아보는 거예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선 말이죠"

“그건 나쁜 게 아니거든요"

“인간의 본능이에요"

“생존본능이요"


나의 실천은 감정에 스피커를 달아주는 방법이었다. 불편한 감정을 불편하다고 해보고, 분노할 일엔 분노도 해봤다. 그래서 단단해지고 건강에 차도가 있다면 반드시 해야만 했다. 나의 몸이니 내가 노력해야 할 문제이지 약으로만 나을 수 있는 병은 아니었다.


문제는 습관이 이성의 값보다 크다는 데 있다. 나는 어떤 심각한 일이 있어도 하루를 못 간다. 금세 잊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냥 덮어 두고 제삼자가 되어 떨어져 나오는 습관이었다. 나를 3인칭으로 떨어져서 보게 되면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단점은 내일이 아니기에 회피자가 될 수도 있다.


며칠 동안 생각해 보니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 어려운 이유는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졌다.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아빠가 웃으시는 걸 본 적이 없다. 늘 짜증 섞인 화를 달고 사셨다. 그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디기 어려운 아이가 나의 내면에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나의 상처를 내 아이에게만은 주고 싶지 않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나는 나의 내면의 결핍으로 오늘의 나를 창조해 냈다.


결핍을 에너지로 쓰는 사람도 있고, 결핍에 습식 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두 방향 다 아닌 다른 지선으로 일탈했다.


나의 결핍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날 삐에로 엄마로 만들었다. 나는 현실과 동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 내면의 트라우마와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밝게 자라도록 이끌었지만 단단함을 가르치는 엄마는 되지 못했다.


나의 사랑은 강한 듯 보였지만 속으론 한 없이 나약했다. 내면의 두려움을 마주할 용기는 경험을 축적하는데서 오는 데 나의 경험은 현저히 낮았다.


진공상태에서는 산소가 없으니 상품이 변질되지 않는다. 하지만 변질되지 않는다는 말은 호흡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삶은 발아하고 피고 지면 분해 되어야 하는 순환의 연속인 것이다.


나는 진공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즉 나는 숨 쉬지 못하는 사람이었단 뜻이다.


오늘은 상담을 다녀온 지 5일째 날이다. 며칠이라도 실천해 보니 왜 그래야 하는지 조금은 알듯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으니 처음에는 불안감이 극도로 커졌다. 초조하고 예민했다. 해결 방안과 계획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는 이성이 날 괴롭혔다. 어떤 상황이든 ‘그래 뭐 할 수 없지’했던 나는 보내 버렸다. 나는 분노하고 싸웠다. 내가 왜 이 모든 일들의 해결사가 되어야 했는지 억울했던 감정을 드러냈다. 나의 압박감이 진공 풀리듯 터진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겁고 호흡하기 어려웠는지 말하고 나니 집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 따로 있고 해결하는 사람 따로 있냐고 분노했다. 지금도 쉽게 화를 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집안 분위기는 불편하지만 나를 누르던 바위는 작아졌다. 표출과 함께 부서지고 깨지는 듯하다. 이제는 화가 많은 사람들의 입장이 조금은 이해된다. 터트리면 나의 컵에 스트레스는 줄어든다. 주변이 힘들어서 그렇지.


하지만 주변이 힘들까 봐 모든 걸 참고 살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는 나를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암묵적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지적 동물이라 경험을 습관화 한다. 관용이 권리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 쉬운 사람,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소중한 만큼 상대도 귀한 사람인 것을.


소극적이고 회피형인 나에게 말한다.

오늘도 현실을 직시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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