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5.14/일)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고요한 시간이다. 맑은 목소리로 새들이 노래하고 창가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은은하다.
이제 아침 5시인데 너희들은 일찍도 일어났구나.
나는 요즘 신비로운 인체체험을 하고 있다. 분홍약을 먹은 뒤론 많이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지며 정신이 맑지 못하다. 하루종일 가수면 상태이며..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내 의지대로 일상을 보낼 수가 없었다. 약간 ‘마약을 한 느낌이 이럴까’ 싶기도 했다. 기분 좋은 마약이 아니고 좀비가 된 마약 같은 느낌이었다.
일상이 불가할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약을 끊었다. 그 약을 안 먹고도 정신이 돌아오는데 삼일이나 걸렸다. 약의 부작용인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결론은 아니란다. 예를 들어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다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듯이 약을 먹어도 신경을 온전히 조절할 수 없는 상태였던 듯싶다. 난 전문가가 아니므로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단약을 하니 정신은 조금씩 돌아왔다. 약이 안 맞던가 약을 이겨낼 체력이 안되던가.. 무슨 이유가 있었지 싶다. 안타까운 건 분홍약을 먹은 후로는 그마저도 없는 체력이 급격히 더 나빠졌다.
시루통속에서 흐물거리는 시루떡 같은 나를 사랑하기란 참 쉽지 않다. 안 아픈 날보다 아픈 날이 많고, 나아졌다 싶으면 다시 악화되는 날 보면 자꾸 약해진다. 나는 내가 홍삼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구증구포처럼 찌고 말리고를 반복하는 모습이 나와 참 비슷하지 않은가.
‘구증구포(九蒸九曝)'이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자면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볕에 말린다'는 뜻이다. [네이버 참조]
난 좋은 한약재가 될 모양이다. 그렇게 말리고 찔 수가 없다. 난 원치 않건만 신은 나에게 어떤 사명을 바라시는가?
신은 이겨 낼 수 있는 고통만 주신다는데, 나를 잘 못 보신게 분명하다.
신의 계획에 차질이 있지 않으려면 내가 홍삼이 되어야 할 텐데.. 난 도라지 정과라도 될는지 모르겠다.
참 많이 기대했었다…
오늘을 상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날짜를 새어 나갔다. 그런데 몸이 악화되니, 오늘이 다가올수록 불안해졌다. 움직일 힘은 없는데 날짜는 어김없이 하루씩 짧아졌다. 그러면서 포기와 희망을 양손에 쥐고.. 놓지도 못하고 잡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2년을 넘게 못 뵈었기에 참 많이 뵙고 싶었다. 샘을 뵙기 위해 나름 노력도 많이 했다. 병원도 여러 군데 다니며 재활치료도 하고, 식단도 바꾸고, 숨찬 나를 이끌고 세 번이나 미용실 예약을 취소해 가며 머리도 잘랐건만.. 슬프게 되었다. 카네이션도 편지도 전해 드릴 수 없게 되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기란 어렵겠지만, 전하지 못해도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참 많이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선생님~”
이 편지를 전하지 못할 듯하다. 슬픈 영자테르가 되고 싶진 않은데.. 오늘 참 우울하다. 지금 체력으론 최선을 다해도 일 킬로도 움직이기 어려운데.. 일산에서 세종대를 어찌 다녀온단 말인가. 항우울제를 안 먹으면 안 먹어서 힘들고, 먹으면 먹어서 더 힘들다.
우울증은 지독한 합병증 같은 병이란 걸 이제는 알겠다.
이제는 하늘로 간 그분이 조금씩 덜 생각나지만 , 여전히 가슴은 아프다. 그가 얼마나 아팠을지 나도 점점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