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6.9/금)

어느 우울증, 불안장애 환자의 일기​

by 이음

<불안장애{공황장애}_지하철 공황>


일이 있는 날이었어요. 그것도 먼 곳에서요. 할 수 없이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탔습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환자는 운전을 하면 안 되거든요. 약을 꿀꺽하고 출발을 했습니다.


불안했지만 버스를 타니 기분은 좋았어요. 가로수에 꽃들도 정류장에 사람들도요. 모두 모두 반가웠습니다. 기사님의 와일드한 브레이크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지하철을 갈아타니 이상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청각이 굉장히 예민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버스는 괜찮았는데 지하철만 다른 게 느껴졌습니다.


“오오, 새로운 증상이네”


“그렇지? 분명히 폐쇄 공포는 아니야, 버스도 탔잖아”


“아니지, 폐쇄 공포는 특정 공간이나 상황일 수 있으니 맞다 틀리다곤 할 순 없지. 같은 상황일 수도 있지만 특정 장소일 수도 있으니깐 “


“그럼 소음공포인가? “


“아, 몰라. 내가 정신과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다 알아, 일단 지켜볼게”

“걱정하지 말고 있어 “


“응, 알았어 “


이때부터 저는 온 정신이 자동 소음 분석기가 되었습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들리더라고요.


이제 보니 지하철 안은 온통 소음 천국이었습니다.


‘철컹이는 바퀴소리, 치익하는 문소리, 뿌웅하는 브레이크 소리, 옆사람의 통화소리, 앞사람의 덜덜 다리 떠는소리, 뒤에 아가씨의 껌 딱딱이는 소리‘


모든 소리들이 분리되어 들렸습니다. 불쾌하고 예민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약간 호흡이 힘들어지고 어지러우면서 휘청할 거 같았어요. 쪼그라드는 심장을 부여잡고 지하철 봉에 기대었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갑자기 후라이드 치킨 냄새가 나는 거예요. ‘갑자기 지하철 안이 치킨집으로 변했습니다 ‘


“아, 맛있겠다. 분명 빠삭하게 잘 튀겨진 거야. 종이봉투에 넣어주는 시장통닭이 분명해 ‘


이렇게 상상하는 사이 긴장이 다 풀렸습니다. 후각으로도 공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시끄러운 소음들과 철컹이는 열차는 달렸습니다. 예전에는 안내방송을 따라 하며 책을 보던 저였는데, 지금은 이 모든 소음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구분됩니다. ‘뭔가, 나는 소머즈가 된 것인가?’


샤악하는 에어컨 켜지는 소리까지 모든 소음을 체크하며 불안을 통제하며 버텼습니다. 얼른 분홍약도 하나 꺼내 먹었습니다. 한 시간 있다 반의 반알도 다시 잘라먹었습니다.


겨우 겨우 목적지에 도착해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더 이상 약을 먹기에는 약의 분량이 너무 오버였어요. 그래서 지하철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랑 소시지를 사 먹었습니다. 왠지 기운이 있어야 잘 버틸 거 같았거든요.


역시 달달하게 먹고 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개찰구로 가다 보니 야채 샌드위치 집이 있는 거예요. ‘아, 진작 알았다면 소시지 말고 저걸 먹을 걸, 이미 배부른걸 ‘ 하며 다시 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타자마자 습관이 먼저 나왔어요. 책마다 며칠 안에 읽어야 할 분량이 있거든요. 많이 밀린 책을 데리고 왔지요. 그 아이를 얼른 꺼냈습니다.


“잘 됐다”

“두 시간 반이면 꽤 많이 읽겠어”


그리고 지하철 문 앞 기둥에 등을 대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밀려서 그런지 집중이 잘 됐습니다. 술술 읽히더라고요. 가끔 시계를 보면 30분이 지났고, 다시 보면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목이 부러질 거 같아서 고개를 들었더니 옆줄칸 의자 앞에서는 사람들이 모여서 난리가 났습니다. 아마 누가 쓰러진 거 같았어요. 급한 일이면 CPR을 해야 하나 살펴보고 있는데 가까운 분이 얼른 나서시더라고요. 옆에서는 119에 전화도 하는 거 같고요. 그분은 금방 호흡이 돌아오시고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다행이다 싶어 다시 책을 보다 보니 정착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공황을 안 느낀 거예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탔을 때는 어색한 환경에 반응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금방 익숙해지니 습관이 이긴 거죠. 십 년 넘게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던 습관이 저를 도왔습니다.


다시 병원 가는 날이 오면 오늘의 일을 여쭤봐야겠습니다. 전 이런 새로운 증상이 나타나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합니다.


이렇게 큰 은하 속 이렇게 작은 지구. 그 안에서도 내가 모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걸까요.


난 참 작고도 하찮은 존재인 것을 무얼 그리웅장하게 산다고 힘들어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미들도 빵 한 조각 짊어지고 오늘을 버티는데, 인간의 빵은 왜 그리도 무거운지요.


꼭 짊어져야 하는 빵이라면 전 이제 공갈빵으로 바꾸겠습니다.


가볍게 사뿐사뿐 살고 싶거든요.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잘 자고 일어났습니다(23.6.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