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기록
버티면 정신이 맑아질까? 아니다. 머리가 아파 약을 하나 더 먹었더니 다시 어벙벙해졌다. 눈도 아프고.. 그냥 자야 되나 보다. 빗소리를 잘 듣고 싶어 아이방에 와서 누웠다. 참 잘 들린다. 퍼붓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빗소리. 마음까지 고요해진다.
밖은 고요하고 차분한데.. 내 눈만 게슴츠레하다.
옛날 옛적에…
20대에 언덕 빌라에 살았던 적이 있다. 비 오는 날이었는데 스커트에 코트를 입고 구두를 신고 나왔다. 언덕이라 살금살금 걸어 내려오다가 뎅굴뎅굴 달팽이처럼 구른 적이 있다. 무릎은 다 까지고 팔에서는 피가 나고 스타킹은 펑크도 나고 난리도 난리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다친 게 아니다. 순간의 쪽팔림이었다. 쪽팔림은 마약보다 강한 진통 역할을 해준다. 나는 흙탕물 코트를 뒤집어쓰고 벌떡 일어나 우사인 볼트처럼 집으로 날아 올라갔다. 딴에는 비가 오면 바지가 축축해질까 봐 스커트를 입은 건데 정말 망한 코디였다. 젊어서 그런 건지 그때는 고통보단 창피한 게 우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머리를 다시 감고 옷도 갈아입고 지각도 안 했다.
갑자기 젊은 날에 내가 그리운가 보다. 그때의 내가 창피하지도 않고 대견하다. 비 오는
날 스커트나 원피스는 좋은데, 언덕에서 구두는 아니란 교훈을 얻었다.
5년 후나 10년 후엔 나도 지금을 기억하면 안도의 미소를 짓고 싶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당신과 마주 보며,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