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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Aug 30. 2021

유산(abortion), 그 처절한 붉은 피의 시간

하늘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붉은 피가 하염없이 흘러내릴 때.


누구의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일단 의사들은 초기 유산의 원인을 수정과정에서의 우연한 사고라고 한다. 염색체 이상이라 할지라도 습관적 유산이 아니라면 사고라고 본다. 주변 어른들은 초기 유산의 원인을 내가 주말에 열심히 놀러 다닌 것 때문이라고 한다. 임신상태에서 조신히 집에서 있지 않고 돌아다닌 것이 원인인 것처럼 말했다. 누구의 말이 옳은 걸까.


의사의 말이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왠지 아기를 잃은 엄마의 마음 한 켠에는 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자책은 서글픔의 바위를 넘어 파도처럼 텅 빈 마음에 넘어 든다. 백신을 맞지 않았더라면, 거제도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그나마 한없이 빠져드는 자책의 심연에서 그나마라는 놈이 나를 구해주고 있다. 그나마 첫째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나마 소파술을 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연배출이 다음 임신을 위해 자궁에 덜 영향을 주는 방법이라잖아.


임신을 확인한 날은 어느 화요일 오후였다. 일을 하다가 쉬는 텀이 있었다. 문득 임신테스트기가 보였다. 세 달째 생리를 안 하고 있었지만, 워낙 주기는 불규칙했고, 두 달의 생리불순 후에 한 달 전에 산부인과를 가서 배란을 확인하고 왔다. 며칠 있으면 배란이 될 것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정확히 언제 임신이 된 건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 인생 하나 제대로 책임지지 못해서 아기를 책임지지 못할 엄마여서 그랬던 것일까. 자책은 자꾸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놀랐지만, 당장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다음날 아침에 병원에 쫓아갔다. 수요일 아침이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산모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었고 한 시간여를 기다려서야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초음파 기구를 배에 대는 순간, "임신이시네요."

너무 기뻤다. 5주 차였다. 둘째는 다음 해쯤 계획하고 있었다. 첫째가 너무 예쁘기도 했고, 가족계획상 두 명의 자녀를 갖자고 남편과 이야기해오고 있었다. 워킹맘이어서 조금 당황은 했지만, 모든 것은 아기를 위해서 맞춰져야만 했다. 그 기쁜 소식을 남편에게만 알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아기 때는 큰 이벤트 없이 건강하게 출산했지만, 출산의 위험은 여기저기서 익히 들었기에 안정기인 13주까지는 선뜻 주위에 알리기가 조심스러웠다.


남편은 너무 좋아했다. 가족들에 모두 알렸고, 가족들이 더 기뻐했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혹시 내가 임신을 모르고 있었던 중에 했던 행동이 혹시 임신에 나쁜 영향을 끼치면 어떨지 너무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아기가 모르고 한 일은 용서해준다고 하지 않던가. 용서를 바랐다.


용서를 받지 못한 걸까. 다음날 아침, 첫째 때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갈색 혈이 비쳤다. 소량이었고, 착상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원에 전화를 했다. 일단 양이 많지 않으면 2주 후에 예약된 시간에 오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많은 가능성을 알고 있었겠지만, 그에 대한 대처도 알고 있었기에 그런 판단을 내리셨던 것 같다. 단 하나의 단서조항인 다량의 혈. 안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혈의 양이 늘기 시작했고, 복통이 시작되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이 느껴졌다. 생리를 하던 때처럼 핏덩어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안 좋은 생각이 들었지만, 잘 버티고 있을 아기를 위해, 불안해하지 않으려 했다. 다만 확인을 위해 다음날 병원에 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으니. 그게 금요일 아침이었다. 또 한 시간을 기다려서 초음파 검사를 했다. 아기집은 잘 있었다. 안도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런 경우는 초기에 흔하므로 괜찮다고 하셨다. 그리고 초기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조치도 없다고 하셨다. 정말 괜찮은 건가.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  처음 겪는 상황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기가 무사한지만 확인할 수 있으면 됐다.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새벽에 복통이 너무 심했다. 생리혈처럼 피가 쏟아졌다. 다음날 아침, 또 중지와 검지를 합친 크기의 핏덩어리를 보았다. 그게 일요일 아침이었다. 이 정도 피를 보고 집에 가만히 앉아서 2주를 기다리는 산모가 몇이나 될까. 내가 너무 염려가 많은 사람인가.  평소에 나는 염려가 많은 사람은 맞다. 그렇다 해도 나는 아기를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방법이 있다면 의사 선생님만 알 수 있다. 첫째 아기를 잘 받아준 분이었기에 신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친절한 스타일의 진료를 하시는 분은 아니다. 그러나 실력 하나만은 시간과 경험이 검증해준 분이었다.


병원에 전화를 하니, 일요일에 수술이 잡혀있는 게 있다고 그 시간에 맞춰서 오라고 했다. 그리고 또 한 시간 여를 기다려서, 하혈과 복통을 참으며 진료를 봤다. 이번엔 조금 화가 나신듯했다. 의사 선생님이. 왜 또 2주를 못 기다리고 왔냐고, 아직 피가 철철 흐르게 넘치는 게 아니면, 하혈이 있다고 해서 유산기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한 시간에 생리대 하나를 다 적실 정도로 피가 철철 넘치지 않는 한 예약했던 그날에 오라고 하셨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겨서 나온 웃음이 아니라 멋쩍어서 웃음이 났다.


괜찮을 줄 알았다. 이것, 저것 찾아보니 출혈이 있을지라도 유산될 확률은 반반이었다. 선생님은 아직 주수가 너무 작아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예약해놓았던 7주 차에 보자는 말만 반복했다. 집에 가서 쉬라고 나를 다독여주셨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괜찮지 않았다. 일요일에 맞고 온 프로게스테론 주사는, 연구결과를 찾아보니 기존에 유산을 했던 산모에게만 유의미하게 유산을 방지해주는 효과가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나 같은 산모에게는 효과가 없었다. 어쨌든 출혈과 복통은 지속되었다. 나는 계속 침대에 누워있었다. 남편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나를 배려해주었다. 첫째 아기에게도 신경을 많이 써줄 수 없었다. 일단은 이 아기를 살려야만 한다.


절박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유산에 대해서 계속 찾아봤다. 눈이 아플 정도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친한 친구가 최근에 임신을 해서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친구도 소량의 출혈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무사히 안정기에 들어섰다. 나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이러한 노력은 곧 무색해졌다. 또 핏덩어리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새벽에는 복통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가 이전보다 많이 나오기 시작한 화요일 아침에 나는 도저히 진료를 보던 병원에는 갈 수가 없어서, 다른 병원을 갔다. 대기가 짧은 병원이었다. 산모도 많지 않은 오래된 병원이었지만 나는 지푸라기를 잡아야 했다. 아기가 무사한 모습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나 핏덩어리 중에  아기집이 흘러나온 것은 아닌지 알아야 했다. 무서웠지만 알고 싶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싶었다. 이 마음이 조급함이라고 꾸짖으면 나는 엄마라는 무기로 그 사람과 대적하고 싶었다. 내 절박함이 내 불안한 마음이 안 좋은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을까. 듣던 대로 대기가 짧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은 바로 질 초음파를 보았다.


"abortion이네. 유산이네요."

"네?"

"여기, 아기집이 7센티가 넘는데 심장이 뛰지를 않네요. 유산되었어요."

느낌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확인하고 싶기도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한 진실 앞에서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냥 멍했다. 복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수술하고 가시죠."

"아, 지금이요?"

그 선생님은 당장 수술을 제안했다. 나는 망설여졌다. 이렇게 빨리 보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야 하나요? 내일 하면 안 되나요?"

"밤새 피가 계속 날 텐데요. 지금 하시는 게 좋아요."

"아. 수술은 오래 걸리나요?"

"아니요, 금방 끝나요. 점심 먹고 오셨나요? "

"아, 네."

다행히 오기 전에 배를 두둑이 하고 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다행이었다. 소파술은 공복에 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수술은 할 수가 없었다. 2시간 금식 후 수술을 해야 했기에 가장 빠른 시간인 2시 예약을 하고 집으로 왔다. 일단 집으로 가야 했다.


가는 도중에 친구와 상의를 했다. 친구는 산부인과 전문의는 아니지만 의사였고, 나를 위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일단 원래 담당 의사 선생님이 그동안의 히스토리를 아는 분이시니 확인을 해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집에 들러서 다시 원래 다니던 병원으로 갔다.


이번엔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도 봐주지 않으셨다. 내가 방금 전에 다른 병원에서 유산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전했다. 소파술을 당장 하자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는 말도 전했다. 그랬더니 이 병원에서는 수술 전 피검사도 해야 하고, 당장 수술은 어차피 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아직은 7주 차가 되지 않았고, 초음파상에서 어떻게 보이든 간에 너무 초기라서 좀 더 기다려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남들은 아기를 하루라도 더 품고 있으라고 하는데 산모(나)는 왜 빨리 결정짓고 싶어서 난리냐고 했다.


순간 망치를 얻어맞은 듯했다. 아직도 아기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걸까. 또 희망을 가졌다. 희망 고문이어도 좋았다. 나는 아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다시 혼이 나고 집으로 돌아갔다. 대신 이번엔 나한테 너무 들들 볶여서 아예 수요일 예약도 월요일로 당기고, 오자마자 7주 차에 아기 확인하고 혹시 유산이 되어있으면 바로 소파술 진행할 수 있도록 수술 전 검사도 다 하고 가라고 했다. 이때 또 웃음이 나왔다. 멋쩍은 웃음이었다. 그 일말의 희망이 날 잠깐 웃게 했다. 그래, 그냥 내가 예민한 산모일 뿐일 거야.


의사 선생님은 월요일 전에 오지 말라고 했다. 단, 단서조항은 피가 생리 2,3일 차의 양으로 3시간 이상 지속될 때는 와도 된다고 했다. 왜인지는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평소와 다름없이 핏덩어리와 출혈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 순간 복통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으로 나를 덮쳤다. 진통제는 감히 먹을 수도 없기에 오롯이 나 혼자 그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아픈 곳은 몸이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그리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출혈이 시작되었다. 3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섣불리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나는 진상 산모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힘겹게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하혈을 하고 있었는데 핏덩어리가 나왔다. 아니 핏덩어리와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나왔다. 그래도 아닐 수도 있었기에 미련하지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병원에 전화를 했다. 이러저러하다. 어찌해야 하나. 그러고 나니 웬일로 당장 오라고 했다. 일단 진료를 봐야 한다고. 그제야 난 병원으로 향했다. 대형 생리대는 금방 피로 가득 찼고, 넘쳐서 흘렀다. 엄마가 첫째를 봐주셔야 했고, 남편은 타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 나는 고통과 오롯이 혼자 마주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일단 무사히 병원으로 가는 일만 생각했다. 운전하면서도 울컥울컥 피가 쏟아졌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 건 솔직히 그 당시에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나에겐 아기가 있기에 그 아기를 위해서도, 잘 버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는 살아야 했다.


병원에 도착했고, 흘러넘치는 피를 여기저기에 쏟고, 의사 선생님은 그제야 초음파를 봐주셨다. 아기집이 배출되었다고 했다. 그게 아기집이 맞았나 보다. 그랬구나. 나는 전혀 기쁘거나 반갑지 않은 사실을 마주하고 그저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정말 이대로 죽을 수도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피를 많이 쏟았다.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를 보시며, 자궁에선 잘 배출되었고, 질 쪽에 조금 남은 부분이 있으니 이를 제거하는 간단한 시술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수술보다 이게 훨씬 산모에게, 자궁에 좋은 거라고 했다. 그런가 보다 했다. 그나마의 위로였다.


일단 나는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기를 위해 무사히 돌아가야 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불편한 시술의 고통을 손가락을 잇자국이 날만큼 꽉 물면서 간신히 견디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수술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다음번 임신 때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각 임신은 별개라고. 그리고 자연배출이 산모의 몸에 제일 무리가 없다고. 실제로 나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하혈을 하고도 수혈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듣기로 임신을 하면 출혈을 대비해서 몸이 많은 양의 피를 만들어서 준비해놓는다고 들었다. 빈혈 기도 없었다. 피가 많이 날 때 일부러 더 악착같이 먹었다. 아프거나 약해질 수 없었다. 나는 어쨌든 엄마니까.


수술실에 누워서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그제야 눈물이 났다. 그전까진 울 수 없었다. 희망이 있었기에. 희망이 다 사라져 버린 그때는 눈물이 났다. 펑펑 울진 않았다. 아직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야 하는 미션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대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나만 무사히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을 했고, 늦은 시간 일을 마쳤다. 워킹맘은 늘 그렇듯 일이 끝나면 또 일이 시작되었다. 아기를 재우고 나서야 쉴 시간이 생겼다.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를 잠깐 위로했던 남편은 배가 고프다며 부엌으로 갔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서 여느 때처럼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병원에서 올려주는 초음파 영상을 보는 앱을 켰다. 보고 싶었다. 앱을 켜고 초음파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지웠던 것이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났다. 동영상이 지워져 버린 사실이 너무 슬펐다.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아기와 짧은 만남이 끝이 났다는 게 현실감이 들었다. 복통도 좀 잦아들고, 출혈도 잦아들었다. 눈물은 잦아들지 않았다. 소리 내어 울다가 침대에서 방금 잠든 아기가 깰까 봐 밖으로 나와서 울었다. 슬프지 않아서 눈물이 이제야 난 게 아니었다. 슬플 시간이 없어서 울지 못했다. 그렇게 눈물과 함께 진짜로 둘째를 보내줬다.


다음날, 엄마가 첫째 아기를 봐주시러 집에 오셨다. 이미 안 좋은 소식은 알려드렸다. 엄마는 미역을 잔뜩 가져오셔서 미역국을 한 솥 끓여주셨다. 또 다른 엄마가 내 앞에 있었다.


난 엄마에게 아기를 품고 있었던 기간도 짧고, 안 지도 얼마 안 돼서 막 슬프지 않다고 말했다.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혼자 있을 때마다 눈물로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나는 강한 엄마여야 해서 열심히 버티고 있다. 나만 슬픈 건 아니기에 슬픈 티를 낼 수도 없다. 가방 속에 산모수첩과 초음파 사진이 생각났다. 차마 버릴 수 없어서 고이 모셔놨다. 초음파 동영상도 미리 다운로드하여놔서 다행이다. 불행 중 다행이다. 엄마는 아기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괜찮은 줄 알았으나 괜찮지 않은 내 마음이 들여다 보인다. 충분히 슬퍼하고 아기가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또 건강한 아기가 와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철옹성처럼 단단하다.


초기 유산은 교통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냥 원인 없이 일어났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아기를 보냈지만, 하혈과 복통이 있어도 아기를 지키는 확률은 반반이라고 들었다. 설사 나와 같은 상황에 쳐해 있다 할지라도 어쩌면 아기를 여전히 아기를 지킬 수 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누군가에게 함께 정말 고생했다고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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