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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녜스 Apr 06. 2022

껌딱지 안고 볼일 보기

뭐, 대단한 육아 -변기 위에서

우리 딸은 생후 7개월 정도부터 낯을 가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딸이 껌딱지가 된 것은.


마를 인지하면서 다른 사람과 구별을 시작한다. 그 후부터 반경 1미터 이상 떨어지려고 하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유일한 양육자가 아니어서 엄마만의 껌딱지는 아니라는 점.


나는 아기를 낳고 3개월 만에 다시 일을 시작한 워킹맘이다. 


무시간에 친정엄마가 아기를 봐주셔서 그런지 딸은 골고루 애착이 형성되었다. 남편도 나의 일이 늦게 끝나면 아기를 돌보기 때문에 아빠와의 애착도 잘 형성되어 있다.


물론, 세 사람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잘 안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난감하면서도 기특한 일이다. 낯을 가릴수록 누군가를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 아기가 잘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므로.


워킹맘으로서 애착 형성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항간의 오해는 엄마 한 사람에게만 혹은 주 양육자 한 사람에게만 애착이 형성되어야 그것이 안정된 애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가족 때처럼 항상 집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혹은 삼촌, 고모 등의 가족 구성원들이 골고루 아기와 애착을 형성했을 때 다인 애착형성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애착형성이 나랑 둘이 있을 때 심해진다는 점이다. 아기는 단 1미터를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정말 우리 사이의 허용거리는 10센티미터.


잠깐 거실에 두고 부엌에 물을 가지러 갈 때도 아기는 운다.  악을 쓰고 운다. 화장실을 갈 때도 예외는 아니다.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 문이라도 닫을 참이면, 세상 난리 난리가 난다. 눈에 안 보이면 닭똥 같은 눈물과 함께 악을 쓰고 엄마를 찾는다.


휴,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아기를 안고 볼일을 본다. 실제로 내 주변에 엄마와 1인 애착이 형성된 아기가 이런 시기를 맞이했을 때, 그 엄마들변비에 걸렸다. 더럽고도 웃프다.


깨끗하지도 않은 변기 위에서 아기를 안고 볼일을 보는 느낌이란.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럴까 싶으면서도,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그래도 안아주면 엄마가 뭘 싸든 지 말든지 헤헤 웃는 해맑은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마저도. 혼자 똥 쌀 권리란 없다.


7개월부터 시작한 이 애착 혹은 집착이 14개월이 지나도 아직 끝날 줄을 모른다. 육아서적을 읽어서 알게 된 사실 18개월 전후로 재접 근기가 오고 그때는 이 집착과 생떼가 극에 달한는 것이다. 벌써부터 어딘가가 아려오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 전후로 이제 제법 말도 통하고 까르르 웃으며 재롱을 부리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 세상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 녹는다.


이 맛에 또 넘어가고 버티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웃고 또 내일이 오나 보다.


부모로서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은 두 돌 전까지 아기가 울 때는 주로 생존과 관계된 일일 확률이 높으므로 훈육이 아닌 빠른 반응과 대처를 하는 부분이다.


물론 어떤 경우는 너무 빠른 대응은 아기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아기의 성품에 따라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육아에서 절대적인 답은 없을 것이다.


이 작은 아기도 하나의 사람으로서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볼 때, 각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민한 아기라면 재빠르게, 조금 수더분한 아기라면 조금 천천히 대응해주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우리 딸은 원래 순둥이었는데 예민해졌다. 성격이 바뀐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참 재밌는 일이다.


혹은 순둥이었는데 내가 너무 빠르게 대응해줘서 예민한 아기로 바뀐 건지는 이 또한 모르겠다.


그저 나는 아기가 너무 힘들지 않은 수준에서 달래고, 안 되는 부분은 안된다고 계속 일러주되, 아직은 겨우 돌 지난 14개월의 아기이므로 많이 안아주고 많이 표현해주는 것이 지금의 나의 엄마로서의 과업이 아닐까 싶다.


변기 위에서 시원해질(?) 자유를 포기하고, 웃는 아기의 얼굴을 보는 기쁨을 대신 누리는 엄마들에게 심심한 공감과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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