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할말있어요
피가 끓어서 글을 쓸 때가 있다. 지금이 그렇다.
한가한 토요일 오후. '유퀴즈온더블럭'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다른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이 프로그램도 일부러 시간 맞춰 챙겨보지는 않고 그냥 채널을 돌리다가 있으면 보는 편이다. 내가 보고 있던 편은 70회로 각 세대 별로 출연자들이 나와서 토크를 했다.
요즘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돌을 덕질하고 있다보니 (내 첫 번째 아이돌 김인성 파이팅!) Z세대 대표로 나오는 소녀들의 말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고, Y세대 토크를 지나 X세대 토크를 보고 있는데 이때부터 피가 끓기 시작하더니 386세대 토크에선 눈물이 줄줄줄 나오고 마지막 산업화세대 토크에서는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뭐지 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나는 정확히 말하자면 '밀레니얼 세대'인데 유퀴즈에서 우리는 다루지 않았으니 X세대 이야기를 들으며 피가 끓지 않았나 싶다.
수많은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서 이미 한 이야기지만 내 입으로도 해야겠다. 이런 소소한 증언들이 나중에 누군가에겐 꼭 필요하게 되기도 하더라. (소소하게 기록하는 건 어릴 때부터 있던 버릇이지만 이 버릇이 나중에 다른 이에게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건 영국에서 배웠다. 징하게 작은 메모지까지도 수집하고 전시하는 영국놈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95년에 돌아가신 아빠가 성수대교를 통해 출퇴근을 하셨다. 지금도 성수동에 그 회사가 있고 현재 큰아버지가 운영하고 계신다. 다리가 무너진 그날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아빠가 중학교에 가는 나보다 늦게 출근을 하셨다. 그래서 아침 뉴스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걸 함께 보고 들었고 나는 아침을 드시는 아빠에게 인사를 하며 집을 나섰다.
그런데 학교를 다녀오니 아빠가 무슨 일인지 매우 삐쳐있었다. 무슨 말을 걸어도 툴툴거리는데 도대체 왜 그러냐고 하니 너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는데 아빠한테 걱정하는 전화 한 통을 안 하냐며 화를 내셨다. 그때도 이 말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놔. 그 뉴스 아침에 같이 봤거든?! 아, 그랬나? 멋쩍어하시며 상황은 싱겁게 종료되었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2분경.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삼풍백화점은 우리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백화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현대백화점이나 롯데백화점보다 훨씬 초호화인 느낌이었다고 하나?엄마와 공짜 백화점 버스를 타고(지금도 있나? 백화점 버스?) 그렇게 백화점을 다녔어도 삼풍백화점은 자주 가지 않았다. 가까우면서도 우리 형편에는 먼 느낌을 주는 그 분홍색 초호화 백화점이 무너진 거다.
그때는 아빠가 이미 암 판정을 받고 더 이상 병원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시다며 집에서 요양 중인 상태였다. 바짝 마른 아빠의 공허한 눈동자가 선명하다. 자기는 곧 죽을 건데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는 세상에 두 아이와 아내를 두고 간다는 걸 알았을 47세의 가장. 그 가장이 멍하니 바라보던 아파트 창문을 때리는 먼지가 대단했다. 동네에서 헬기가 계속 낮게 날았고 내가 다니던 학원 옆 정형외과에는 피를 흘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말 동네 상가 안에 있는 작은 의원 수준이었는데 거기가 다친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사람들을 지나서 굳이 국영수 학원을 간 8학군 학생들, 지금 만나면 오늘은 학원에 가지 말라고, 아니면 적어도 다친 사람들은 직접 보지 말라고 눈을 가려주고 싶다.
다음 날 학교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난리가 났다. 누구 언니가 죽고 누구 엄마가 죽고 학교 날라리들은 그 와중에 골프채를 주웠네 가방을 주웠네 하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철없는 소리들로 무거운 분위기를 한층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사고가 나고 며칠이 지나서 (최장 15일) 생존자가 계속 나왔던 뉴스들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사람이 그 잔해에 살아있었다고? 신기해하며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심리상담사한테도 말했지만 이 일들이 내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지는 않다. 아빠는 그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라 암으로 돌아가신 거고 나는 두 사건을 간접적으로 가깝게 겪으면서 사고에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 되긴 했지만 그게 나를 여태 다치지 않게 만들어줬다고 믿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나는 어딜 가든 어디로 탈출해야지, 이런 사고가 나면 저렇게 행동해야지 미리 상상하는 예민한 습관이 있다. 상담을 받으러 문을 열고 들어갈 때도 이 문이 갑자기 뜯어져서 내 발을 찍으면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내 삶을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으니 상담사도 괜찮다고 했다. 아니다. 피곤한 건가? 수 년 전 런던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다가 정전으로 잠깐 깜깜해지자 나는 출구를 찾아 혼자 미친듯이 뛰었다. 그게 무너질까봐.
그리고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그때 나는 강남역에 있었다. 그때 내가 이미 대학생인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르겠다. 술도 마실 수 있었고 어른의 동의 없이 외출할 수도 있었다니!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그때 내가 청소년이라 엄마가 위험하다고 못 나가게 했다면? 그때 내가 청소년이라 맥주 한 잔도 못 마시고 있었다면? 말도 안 된다! 그때 사진들이 싸이월드에 잔뜩 있을 텐데 아직 남들처럼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는 못하겠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월드컵 4강진출까지. 노랗게 염색한 지금은 한 아이의 아빠라는 출연자가 신 나게 그때 이야기를 하는데 내 얘기를 곁들이고 싶어서 피가 막 부글부글 끓는 것이다. 맞아맞아 라떼는 말이야 홍대 락카페 맞아맞아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자꾸 하면 꼰대라고 다른 세대들이 싫어한다기에 조용한 브런치에 글로 남겨둔다.
이거 끝까지 읽은 당신도 어쩌면 내 세대. 반갑다 친구야? (악수 청함. 이거 알죠?)
그래도 나 토요일에 초등학교 수업 끝나고 (그렇다 그땐 토요일에도 학교 갔다) MBC에서 해주는 레밍턴스틸 보려고 집에 미친듯이 뛰어갔다는 이야기는 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