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게 위험한 우유
제목은 어그로라 배웠습니다
친정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엄마와 장바구니 관련해서는 전혀 합의가 되지 않고 있다. 내가 자주 가는 대형마트와 엄마(=60대 후반 할머니)가 자주 가는 채소 생선 싱싱한 마트가 다르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사오는 요즘 마트 물건들을 보며 '이런 게 새로 나왔네?'하시고 나는 '아냐 엄마 이거 십년전에 나온 건데 엄마가 몰랐던 거야.'라고 대답하기 일쑤이다. 아무리 내가 십년 동안 해외생활을 하느라 엄마를 자주 들여다보지 못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 요즘 물건, 요즘 먹을거리에 대해서 소외된 채 살고 계실 줄이야. 반대로 엄마가 사오는 뚱뚱한 고등어와 당장 다시 심어도 무럭무럭 자랄 것만 같은 싱싱한 채소들을 보며 나도 감탄하곤 한다. 엄마가 동네할머니들이 자주 간다는 그 마트에서 사오는 먹을거리들은 대형마트의 플라스틱 소포장 안에 갇혀 숨죽이고 있던 생물들과 전혀 다른 자태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제품들을 사오다보니 어느 날 냉장고를 열었는데 우유가 3개였다. 그것도 큰 사이즈로. 1+1 행사를 해서 사오셨다는 엄마와, 집에 우유가 없으니까 한 통 사온 나의 우유가 합쳐져 그리 된 것이다. 며칠동안 평소에 자주 마시지 않는 우유를 먹어 치우느라 고생을 했다. 우리가 우유를 사오는 이유는 집에 성장기 어린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 어린이는 우유를 전혀 드시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초코가루에 섞어주면 마신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렇게라도 마셨으면 하는 마음에 우유와 초코가루를 열심히 구입한다. (이렇게 마셔도 우유를 안 마신다고 할 수 없는 거 맞지?!)
며칠 전, 아이에게 우유를 따라주는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했다.
- 엄마, 그거 알아? 노인에게 우유는 위험한 거야.
뭐 새로운 연구 결과라도 뜬 것인가? 우유 마시는 노인의 사망률이 높아지기라도 한 것인가? 요즘 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우유도 결국 해로운 음식이 된 것인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엄마답게 이런저런 생각의 카펫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아이가 우유 겉면을 보여준다.
- 이거 봐. 특히 우유가 2개 있으면 더 위험하대.
Aㅏ... 이건 안 찍을 수 없다.. 너무 귀엽잖아....?
노인을 우유로 위험하게 하지 않으려는 이 아이의 심심한(깊고 간절한) 문해력에 감탄하였다.
- 엄마 이거 봐. 우유가 없으면 제일 좋고 1개 먹는 건 괜찮은데 우유를 2개 마시면 위험하대!
한국에 갑자기 와서 이만큼 한국어를 잘하는 것은 진짜 6년 동안 칭찬해도 모자라긴 하지만 똑바로 읽지 않아서 틀리는 수학문제가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긴 하다. 예를 들면 로운이가 인형이 10개 있고 인성이가 5개 있으면 로운이는 인성이보다 몇 개 더 많은 걸까, 이런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고 10와 5만 떼어서 읽은 후 마음대로 더해버린다. 그리고 당당하게 15개! 라고 대답하는 일이 잦아진 요즘이다.
너무 귀여운 생각을 했지만 차근히 설명해줘야할 타이밍.
우리 앞집에 할머니가 혼자 사시잖아. 근데 그 할머니 집앞에 택배가 막 쌓여있어. 며칠동안 계속 쌓이기만 해. 그게 무슨 뜻일까?
- 할머니가 주무시나보지.
또는...?
- 할머니가 화장실에 계시나...?
('빠직'은 잠시 넣어둬..) 그럴 수도 있지만 할머니가 아프셔서 못 나와보는 걸 수도 있지. 그러면 할머니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밖에 있는 우유로 확인한다는 뜻이야. 우유를 안 갖고 들어가셨으면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일 수도 있거든.
- 아하! 그러면 우유를 마셔도 되네!
딩동댕
일단 우리집 어린이에게는 '우유배달'이라는 서비스가 친숙하지 않다. 늘 그때그때 마트에서 사다 보니 현관문 고리에 걸려있는 우유/착즙주스 집어넣는 초록/은박주머니도 모르고 아파트에서 우유나 신문을 넣으라고 만들었던 현관문 아래 구멍이 도둑들의 신박한 엔지니어적 기술 덕에 현관문을 따는 도구로 전락한 후에 다시 다 막아버렸다는 이야기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너를 이해해. 우유가 밖에 있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애초에 우유가 왜 밖에 있음? 이라고 생각할 테니) 우유를 마시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너를 이해하고 있어, 엄마가.
2017년 1월 영국에서 우유 사고 집에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