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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Oct 14. 2022

살만 꼬집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문제점도 꼬집을 수 있는 것이 우리말

2022년 10월 현재, 처음으로 우리 아이를 만난 사람이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이 아이가 2년 5개월 전만 해도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던 아이였다는 것을. 해외에서 눈치로 새 언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처럼 우리 아이도 2020년에 그렇게 한국어를 시작했다. 당시에 아이 언어가 귀여워서 저장해두었던 것을 꺼내보자.


- 거짓 치우고 진실할 거야 (거짓말 하지 않을 거야)

- 눈 감아준다는 게 무슨 말이야? (=봐준다:남의 입장을 살펴 이해하거나 잘못을 덮어 주다)

- 선을 넘는 게 뭐야? (선:다른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한계나 그 한계를 나타내는 기준)

- 엄마, 머리카락 좀 비켜줘 (빗겨줘)

- 땀을 벅벅 흘렸어 (뻘뻘 발음이 되지 않았다)

- Zoom in 여러분 (주민여러분)

- 허수아버지


위와 같은 시절을 지나 지금은 '뻥 치지 마' '선 넘네' '어쩔라고 저쩔라고' 같은 말도 잘 하고, 벅벅/뻑뻑/뻙뻙 까지 발음해내는 대한민국의 초등학생이 되었다. 여전히 '언론 자유' 같은 건 'Alone 자유'로 듣고 '근린공원'을 'Gling 공원'으로 듣는 귀이지만 그건 이중 언어 아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우리 아이는 <원위치로 돌려놓으라>는 말도 <One Each로 돌려놓으라>는 말로 해석한다. 각자 하나씩 돌려놓으라는 말로 듣는 것이다. 아무리 지금 한국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해도 외국에서 태어났고 영어만 듣다 왔는데 당연하다. 고치라고 닦달할 생각은 전혀 없다.


www.brunch.co.kr은 어떨까?

나는 이걸 따따따브런치라고 읽는데 우리 아이는 워워워브R언치 라고 읽는다. 태어나서 들은 게 그렇기 때문일 거다. 우리 아이는 한국에서 말하는 <파닉스>라는 걸 공부 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냥 자기 언어였기 때문에 알았다. 우리 한국인이 깻잎을 연음법칙을 적용해 [깨싶]으로 읽지 않는 것처럼. 사실 나도 영국영어를 오래 하다 와서 한글로 쓰여있는 <파.닉.스.>도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파닉스가 뭐야? 피닉스도 아니고. 아아아! [fɒnɪks]!!로 발음하며 개인적인 깨달음을 얻었어야 했던 것이다. 영어를 한글로 쓸 때는 함께 표기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 대중교통버스에는 왜 또 영어만 잔뜩 쓰여있는지 모르겠다. DO NOT STAND THIS AREA인가 DO NOT STAND HERE였던가 한글하고 같이 써야 어르신들이 이해할 것 아닌가. WW 진정하자.


진정의 구분선 투하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꼭 이중 언어 아이라서가 아닌 그냥 아이라서 하는 질문들이 나를 즐겁게 했다.


- 선생님이 똑똑하게 봤대. 그럼 멍청하게 보는 것도 있어?

- 햇살이 왜 달콤해? 뜨겁지

- 모기에 물려서 살 위에 올라갔어 ('붓다'를 몰라서 '살 위에 올라갔어'로 표현)

- 무좀에 걸린 할머니 발을 보며 '엄마, 할머니 발톱이 시들고 있어'

- 아직도 '비법'은 [비뻡]이 아니라 [비법]으로 읽고

- 할머니를 따라서 교회를 다니고부터는 '성형수술'을 '성경수술'로 듣기 시작했다. '성경'은 매주 듣는 말이지만 '성형'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게 관련 있는 언어라고 생각한 것

- 걸어서 데려다주는데 횡단보도에서 내려달라고 한다든가 (차에서 내리는 것처럼 거기까지만 데려다준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

- 문제점을 어떻게 꼬집어?

- 엄마, 체스 차려줘. (체스판을 세팅하라는 뜻)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의 언어는 '' 표현 대신 '심었다' 하는 .

죽은 꿀벌들이 길가에 보이면 그걸 주워서 '엄마, 이 벌 심어주자'라고 말한다.

가끔 어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내가 엄마를 잘 심어줄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수목장 당첨.


2022년 10월 현재, 오늘 아침.

기억을 더듬으며 며칠에 걸쳐 쓴 이 글을 오늘은 마무리하고 올려야지 했다. 요즘엔 집중력이 떨어져서 일필휘지할 수가 없다. 몽롱한 상태로 아이 아침을 차렸다. 스티커 때문에 억지로 먹는 포켓몬빵과 과일주스. 아이가 주스병을 흔들지 않고 그냥 컵에 따르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이런 말을 한다.


"엄마, 주스 마실 때 진실의 맛을 알고 싶으면 꼭 흔들어서 먹어야 돼."

'거짓 치우고 진실할 거야'라고 말하던 2020년의 아이가 겹쳐보였다.

그리고 오늘은 꼭 이 글을 마쳐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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