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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Dec 14. 2022

오늘 아침

브런치 글쓰기 오랜만

영하 11도의 겨울 아침 날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오랜만의 영하이기도 하고 길이 미끄러운 곳이 많아 어린이들이 꽈당꽈당 넘어지는 모습에 살짝 긴장도 했지만 며칠동안 외출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는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은 상쾌한 시간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다다르자 한 어르신과 계속 같이 걷게 되었다. 처음 보는 분이었는데 그렇다고 내가 이 단지 사람들을 다 아는 것도 아니니까 뭐. 그런데 이 분이 계속 나를 따라서 우리 아파트로 들어왔고 승강기도 같이 타게 되었다. (옥장판X 종교권유X 다단계X 정수기X 보험X)


최근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는 아까 얼음 위를 걷던 느낌으로 돌아가 다시 긴장을 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아파트 1층에서 성인 남자가 서성이며 있는데 내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파트로 들어가면 뒤따라 들어와서는 괜스레 말을 거는 경우이다. (공주병X 도끼병X) 아마 배달 때문인 것 같은데 나는 당근과 쿠팡이 뭔지는 알아도 내 폰에 깔려있지 않아서 그 생리를 잘 모른다. 본인이 본인 의지로 따라 들어와놓고는 '여기가 몇 호 라인이죠?' '제가 당근하러 왔거든요' '근데 이분이 연락이 안 되어서' 등등의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당근 씹는 얼굴을 하고 들어주긴 하지만 이 사람이 진짜 당근을 하러 온 건지 갑자기 주머니에서 흙당근을 꺼내서 나를 칠 것인지 내가 승강기에서 내릴 때까지는 긴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이 어르신도 이 바쁜 등교+출근 시간에 배달이라도 하러 오신 건가..했다. 이분은 내가 누른 층의 바로 위층 버튼을 누르고는 말을 걸어왔다.


- 몇 호 살아요?


한국 어르신들의 화법이다. 당황하지 않는다. 몇 호? 라고 하지 않는 걸 감사하게 여긴다. 그런데 내 입에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런 말이 나왔다.


- 왜요?


요즘 것들의 화법이다. 어르신은 당황한다. 앞뒤 다 자르고 처음 본 사람이 들입다 주소를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싫어요, 가 안 나오면 다행아닌가? 뭘 당황까지. 요즘 유치원생은 아마 대답도 안 할 거다.


- 아니.. 내가 위층을 눌렀으니까.. 그럼 밑에 사는 거니까.. 혹시 우리 밑인가 싶어서 어버버버


내가 만약 고층에 살았다면 '이 버튼을 눌렀다는 게 이 층에 산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느냐'는 취지의 말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저층에 산다. 시간이 없었다.


- 00호요. 몇 호 사시는데요?

- 00호요.

- 아니네요? 그럼 안녕히 올라가세요.


<가세요> 사인에 딱 맞추어 문이 열렸고 나는 승강기에서 내렸다.


글자로는 길게 늘어놨지만 정말 잠깐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갑자기 2015년쯤에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했다.


해외생활 N년차였고 영어에 무리가 없었음에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원하는대로 말과 행동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일어난 일이다

아기를 안고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우리 단지는 한국 아파트처럼 큰 단지가 아니라서 서로 얼굴 정도는 알고 지냈지만 워낙 이사가 잦아서 서로 모르고 지내기도 일쑤였다. 그날, 아마도 여기 사는 것 같은 처음 보는 여자가 아기를 안고 걸어 들어오는 나를 보더니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말을 냅다 걸었다.


- (영어) 너 여기 살잖아. 너 지금 너네 주차장 안 쓸 거지? 지금 내 주차장에 누가 차를 대놔서 내가 지금 엄청 바쁜데 미치겠어. 나 네 주차장 좀 쓸게.   

- 에.. 어.. 오케이.. 어버버버버


주차장을 안 쓸 거니까 상관없긴 한데 집에 들어와서야 기분이 나쁘기 시작했다.

excuse me도 없었고 thank you도 없었네? 심지어 please도 없었어. 나는 왜 99학년도 수능 영어 듣기평가를 치르는 사람처럼 <내가 흥분한 너의 영어를 다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냥 오케이를 했을까. I don't like your tone. Where is my thank you? 정도는 날려줬어야 했는데.. 하며 이불킥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혹시나 오늘 처음 본 어르신을 흙당근 씹은 표정과 말투로 잠시 당황하게 했더라도 그건 내가 몇 년 전에 겪은 트라우마(?)가 발현된 것이라고 너그러이 봐주시면 좋겠다. 아마 앞뒤 자르고 몇 호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그때처럼 <내가 너의 한국어를 알아들었어>라는 표정으로 '몇호요!'라고 바로 대답했더라도 또 이불킥을 했을 거니까. 두번 실수는 없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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