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eon Jan 31. 2023

아빠가 언제 돌아가셨냐는 질문의 답이 계속 바뀌었다.

    

너 아직도 돌아가신 아빠 얘기 쓰냐고 물어도 할 수 없다. 자꾸 생각이 난다. 게다가 내가 아빠 얘길 안 하면 누가 할까. 아마 아무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우리 동네 도서관은 평소에 7권을 빌릴 수 있지만 마지막 주엔 무엇 때문인지 너그러워져서 14권을 대여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만 나는 한번에 스무권씩 빌릴 수 있었던 동네(영국)에서 살다 온 관계로 처음에는 놀라긴 했다.      

어떤 집은 같은 동네에 사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도서관 카드까지 합친다고 했다. 그러면 아빠 엄마 아이 둘까지 더해서 6명 곱하기 14권, 무려 그 주에 84권을 빌릴 수 있다. 그 얘길 들으면서도 난 아빠 없는 사람 티를 낸다. 속으로. 칫, 나는 같이 사는 친정엄마 도서관 카드나 겨우 만들 수 있겠네. 결국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카드는 세 개이다. 내 거, 엄마 거, 아이 거. 14권 곱하기 3명, 52권. 나쁘지 않네, 뭐. 이렇게 아빠 없는 삶을, 있는 삶과 비교하며 산지 올해로 27년이다.      

조촐한 가족관계 덕분에 내가 최대로 빌릴 수 있는 52권까지는 아니더라도 팔힘이 닿는대로 십 수권의 책을 빌렸다. 꾸역꾸역 천가방에 넣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갑자기 든 생각이 지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아빠가 언제 돌아가셨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지난 27년 동안 나의 대답이 바뀌어온 것이다.      



95년 10월.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고 중학교로 돌아갔을 때는 당연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친한 친구들은 이미 장례식에 왔다 갔으니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물을 이유도 없었다. 나 없는 사이에 이미 다 지나간 일이었을 거다. 왜 돌아가셨대, 아프셨대, 원래 병원에 오래 계셨대, 성격이 밝아서 전혀 몰랐네, 뭐 그런 얘기들.      

그리고 새롭게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중학교에서 온 아이들은 내가 아빠가 돌아가신 아이라는 걸 알지만 그걸 모르는 다른 중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훨씬 많으니까 내가 원래 하던 대로 밝고 재미있는 아이로 지내도 '너 이제 아빠 돌아가신 거 괜찮구나, 다행이다(1)', '너 돈 버는 아빠가 안 계시면 요즘 뭐 먹고 살아?(2)'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다. (실제로 중학생 때 (1)은 안 친한 남학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고 (2)는 친한 여학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다)  

              

예전엔 학교에 내야하는 여러 서류에 별별 것을 다 적어냈었다. 요즘엔 인권이 어쩌고, 개인정보가 어쩌고 그래서 아빠 직업 엄마 직업, 쓸모없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따위는 안 적어도 된다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걸 꼼꼼하게 읽은 선생님들 덕분이었을까.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 J는 이혼/재혼 가정의 아이였다. 전혀 말하지 않아서 졸업을 앞둔 고3 때야 알게 되었다. 별별 것을 다 적어냈어야 하는 그 학교 서류를 그 애 책상 위에서 우연히 보고 알게 된 것이었다. 그제야 '사실 나도 아빠가 안 계셔, 중학생 때 돌아가셨어'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친했고 서로의 집을 들락날락 하며 각자 집 김치의 다른 성질도 논했으면서 가정사는 알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선생님들은 그런 가정의 아이와 저런 가정의 아이가 붙어 다니니까 우리를 떨어뜨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내가 초등학생을 키우며 담임 선생님들과 상담을 해 보니 더 그때 그게 맞았구나 싶다. 결손가정의 청소년 둘이 친하게 지내며 사고 안 치고 붙어 다니는데 뭐하러 반을 찢어놓겠는가. 우리가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건 우리 생각처럼 우리의 우정이 대단해서도, 우리 둘이 친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도 아니었던 거다.      


'중학생 때 돌아가셨어'라는 대답은 대학에 가서도 꽤 유지되었던 것 같다. 그냥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면 좀 모호해서 1년? 2년? 그러면 내가 슬픔에서 덜 빠져나와 툭 치면 우는 거 아닌가 싶은 걱정의 눈빛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변에 아빠 돌아가신 사람들이 없어서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벌벌 떠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빠는 중학생 때 돌아가셨어'라고 말할 때는 '물론 아빠가 안 계신 건 지금도 내 삶에 영향이 있고 매우 슬픈 일이지만 툭 치면 울만큼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라는 투의 내 표정이 함께 제공되었다.    

  

방송작가를 꿈꾸고 대학 졸업 전부터 방송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중딩 때'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건 뭔가 어려보이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95년에 돌아가셨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때 넌 몇 살이었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오는데 사회에서 만난 다양한 나이의 사람들이다보니 당연한 되물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중학생이었다고 대답하면 '어렸네..'라는 연민의 리액션이 돌아왔다.      


그리고 올해로 20년 차 방송작가가 되었다. 내가 아빠가 계신지 안 계신지 아빠가 둘인지 셋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나이이다.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세상이 바뀌어서 하는 일과 관련해 가족관계를 꼬치꼬치 묻는 일도 없다. 하지만 어쩌다가 밝혀야 할 순간이 왔을 때 95년에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건 무슨 공룡멸종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이라 그렇게 대답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그동안 내가 아빠가 없어서 겪었던 여러 서러운 일들을 보상받고 싶다는 듯이, 나 아빠 없으니까 불쌍하지, 내가 늙어서 그런가 요즘엔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더라, 라는 투로 '아빠는 내가 14살 때 돌아가셨지'라고 대답한다. 지금 우리 나이는 어린이들을 키우고 있을 나이라, 이렇게 대답하면 지금 내 자식이 아빠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내가 얼마나 불쌍했었는지 공감해주는 얼굴들을 볼 수 있다.

내가 14살 때는 나를 불쌍히 여기는 그 표정이 너무 싫었는데, 아빠 없어도 나 잘났다고 그렇게 뻐겼는데 지금은 이렇게 봐주면 그동안 살아온 내 인생이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거 같아서 그런 표정을 보는 게 싫지 않다. 지금 내 나이에 아빠가 95년에 돌아가셨다고 대답하면 아무도 날 여겨보지 않을 텐데, 같은 말도 14살 때 돌아가셨다고 대답하고 혼자 위로를 얻는다.           


95년은 이제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sf9 다원이가 태어난 해이고 온앤오프 와이엇, MK가 태어난 해이다. 그것만 생각해도 입가에 엄마 미소가 지어지는 해, 1995년. 하얀 소복을 입고 장례식장에서 울던 14살 여자아이가 묻는다. 돈 버는 사람이 없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요? 이제 너무 슬퍼서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웃어요?     


여기에 울지 않고 대답할 여유까지 생겼다.      


나중에 네가 벌더라.

슬프면 슬픈 음악 들으며 울면 되고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살면 돼.

그리고 84권을 안 빌려주면 54권을 빌리면 되더라고.      


아직 멀었지만(!) 50대엔 뭐라고 대답하려나. 50대에는 14살에 돌아가셨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그때도 그러면 철없어 보인달까, 성장 아니 성찰을 멈춘 느낌이 든달까. 십 수권의 책을 담은 가방이 어깨를 짓누른다. 아프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책을 옮기면서 이런 생각이 떠올라도 되는 건가. 철없어 보여도 봐줄 것 같은 마지노선이 내겐 40대인 걸까.

          

작가의 이전글 오늘 아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