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cleaning
나는 신체정신이 건강하다고 판단되는 4n세 인간이지만 쌓여가는 작은 메모들을 보면서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이걸 어쩌지? 이 메모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나 뿐인데.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했던 2012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조각조각 쓸 거리들을 모아두었던 것들이 notes에 잔뜩 있는 걸 보고 겁이 났던 것이다.
이뿐인가. 어릴 때부터 써 온 일기장은 그나마 해외이사를 하면서 정리를 해두었던 것 같은데 2008년 입회 이후 방송작가협회에서 매년 보내주는 다이어리에 조금씩 기록하거나 또는 기록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워 이렇게 표현하자면 갈겨놨던 것들은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 지 펼칠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다.
"정리에 대한 반감은 극단적이 됐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보관한다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죽음에 죽음을 더할 생각은 없었다." <사진의 용도 중 by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물론 이 분은 유방암을 얻은 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만약 병을 얻는다면 이 조각조각 글감들을 다 어서 정리하고 죽어야 한다는 강박에 죽지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인 건 내가 죽더라도 정리할 만한 물건들은 거의 없다. 미니멀까지는 아니지만 몇 번의 해외 이사 덕에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지를 알게 된 것이다. 좋은 게 있으면 뭐해, 비행기에서 깨질 건데. 비싼 거 부치면 뭐해, 세금 내라고 할 텐데. 뭐 이런 전개.. 덕분에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보관하거나 할 일은 없어 편하겠지만 내가 적어둔 글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건 누구에게 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설사 준다고 해도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완성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나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여름에 보관한 첫 번째 메모를 보자.
NATO Phonetic Alphabet이다.
https://www.consultingcops.com/the-phonetic-alphabet
경찰인 남편이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 알파벳을 특이하게 설명하는 걸 듣게 됐다.
예를 들어 WAR를 이야기 할 때 나라면 더블유, 에이, 아르..라고 말할 것을 그는 Whiskey, Alpha, Romeo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게 멋있어 보여서 나도 저렇게 말해야지, 내 이메일 주소는 Echo, Golf, Echo, Victor, Echo.... 라며 적어두고는 여태 못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메모는 다행히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메모이지만 내가 왜 이걸 저장했는지는 몰랐을 수 있다.
몇 년을 더 스크롤해보면 2018년 10월에 <영국과 한국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라는 글이 보인다. 남에게 어떤 부탁을 했을 때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보답에 대한 시간이 다르다는 내용의 글이다. 오래 걸려서 갚아야 하는 큰돈을 제외하고는 뭐 간단하게 책을 빌렸다거나 시간이 안 맞아서 대신 아이를 픽업해줬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의 경우, 고마움의 표시를 문자든 말이든 커피 한잔이든 영국의 경우에는 한 1-2년 뒤에 갚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오랜 시간동안 나의 선의(?)를 잊지 않고 갑자기 1-2년 뒤에 언급하면서 이걸 갚는다고? 지금? 이런 느낌이었달까.
한국에 살 때는 달랐다. 하루이틀만 지나도 뭐 이 인간은 고맙다는 문자 하나가 없어 내가 호구짓했구나 하며 벌써 손절각을 재는 타이밍이었을 텐데.. 신기해하며 이거에 대한 예를 조금 더 경험해보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잊힌 것이다. 이 메모를 저장하고 약 2년 뒤에 한국에서 다시 살게 되었는데 한국의 시간은 여전히 빨랐다. 하루가 뭐야. 당장 고맙다며 커피 쿠폰도 카카오톡으로 바로 쏠 수 있는 아주 빠른 나라가 되어있었던 것을.
"영국에선 I owe you.라고 쓰여 있는 한 장의 조커 카드를 받은 느낌이었다. 내가 이번에 도와줬으니까 다음에 내가 이 카드를 꺼내면 넌 무조건 날 도와줘야 되는 거야. 이건 유효기간도 없어. 일년이 될 수도, 십년이 될 수도 있지." (Oct 8 2018 11:02PM 저장)
오늘부터라도 하나하나씩 꺼내어 정리해야겠다. 3월 27일에 갑자기 정하는 새해다짐. 좋은데?
“언제 마음속에 멋진 발상이 떠오를지 결코 모르지만, 어머나, 그런 발상이 떠오르면 양손으로 움켜쥐고 꽉 붙잡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즉각 메모를 해 두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행운-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 중에서 by 로알드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