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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Mar 27. 2023

우리는 이걸 봄맞이 청소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spring cleaning

나는 신체정신이 건강하다고 판단되는 4n세 인간이지만 쌓여가는 작은 메모들을 보면서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갑자기 죽기라도 하면 이걸 어쩌지? 이 메모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나 뿐인데.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했던 2012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조각조각 쓸 거리들을 모아두었던 것들이 notes에 잔뜩 있는 걸 보고 겁이 났던 것이다.


이뿐인가. 어릴 때부터 써 온 일기장은 그나마 해외이사를 하면서 정리를 해두었던 것 같은데 2008년 입회 이후 방송작가협회에서 매년 보내주는 다이어리에 조금씩 기록하거나 또는 기록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워 이렇게 표현하자면 갈겨놨던 것들은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 지 펼칠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다.  


"정리에 대한 반감은 극단적이 됐다. 무언가를 정리하고 보관한다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죽음에 죽음을 더할 생각은 없었다." <사진의 용도 중 by 아니 에르노, 마크 마리>


물론 이 분은 유방암을 얻은 후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만약 병을 얻는다면 이 조각조각 글감들을 다 어서 정리하고 죽어야 한다는 강박에 죽지도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인 건 내가 죽더라도 정리할 만한 물건들은 거의 없다. 미니멀까지는 아니지만 몇 번의 해외 이사 덕에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지를 알게 된 것이다. 좋은 게 있으면 뭐해, 비행기에서 깨질 건데. 비싼 거 부치면 뭐해, 세금 내라고 할 텐데. 뭐 이런 전개.. 덕분에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보관하거나 할 일은 없어 편하겠지만 내가 적어둔 글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건 누구에게 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고 설사 준다고 해도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 완성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나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여름에 보관한 첫 번째 메모를 보자.

NATO Phonetic Alphabet이다.


https://www.consultingcops.com/the-phonetic-alphabet

경찰인 남편이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 알파벳을 특이하게 설명하는 걸 듣게 됐다.  

예를 들어 WAR를 이야기 할 때 나라면 더블유, 에이, 아르..라고 말할 것을 그는 Whiskey, Alpha, Romeo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게 멋있어 보여서 나도 저렇게 말해야지, 내 이메일 주소는 Echo, Golf, Echo, Victor, Echo.... 라며 적어두고는 여태 못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메모는 다행히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메모이지만 내가 왜 이걸 저장했는지는 몰랐을 수 있다.


몇 년을 더 스크롤해보면 2018년 10월에 <영국과 한국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라는 글이 보인다. 남에게 어떤 부탁을 했을 때 고마운 마음으로 하는 보답에 대한 시간이 다르다는 내용의 글이다. 오래 걸려서 갚아야 하는 큰돈을 제외하고는 뭐 간단하게 책을 빌렸다거나 시간이 안 맞아서 대신 아이를 픽업해줬다거나 하는 사소한 것들의 경우, 고마움의 표시를 문자든 말이든 커피 한잔이든 영국의 경우에는 한 1-2년 뒤에 갚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오히려 오랜 시간동안 나의 선의(?)를 잊지 않고 갑자기 1-2년 뒤에 언급하면서 이걸 갚는다고? 지금? 이런 느낌이었달까.


한국에 살 때는 달랐다. 하루이틀만 지나도 뭐 이 인간은 고맙다는 문자 하나가 없어 내가 호구짓했구나 하며 벌써 손절각을 재는 타이밍이었을 텐데.. 신기해하며 이거에 대한 예를 조금 더 경험해보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잊힌 것이다. 이 메모를 저장하고 약 2년 뒤에 한국에서 다시 살게 되었는데 한국의 시간은 여전히 빨랐다. 하루가 뭐야. 당장 고맙다며 커피 쿠폰도 카카오톡으로 바로 쏠 수 있는 아주 빠른 나라가 되어있었던 것을.


"영국에선 I owe you.라고 쓰여 있는 한 장의 조커 카드를 받은 느낌이었다. 내가 이번에 도와줬으니까 다음에 내가 이 카드를 꺼내면 넌 무조건 날 도와줘야 되는 거야. 이건 유효기간도 없어. 일년이 될 수도, 십년이 될 수도 있지." (Oct 8 2018 11:02PM 저장)


오늘부터라도 하나하나씩 꺼내어 정리해야겠다. 3월 27일에 갑자기 정하는 새해다짐. 좋은데?



“언제 마음속에 멋진 발상이 떠오를지 결코 모르지만, 어머나, 그런 발상이 떠오르면 양손으로 움켜쥐고 꽉 붙잡아야 한다. 중요한 점은 즉각 메모를 해 두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행운-나는 어떻게 작가가 되었나> 중에서 by 로알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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