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이걸 조각모음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어제는 스마트폰과 매년 선물 받는 플래너? 수첩? 다이어리? 안에 있는 글 조각조각들을 정리하지 못하는 내 얘기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정리하는 걸 올해 새해다짐으로 하겠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했었다.
새해다짐은 작심삼일이어야 제맛이지.
이틀 차인 오늘. 브런치에서 <작가의 서랍>이라는 걸 들여다보니 여기에도 정리되지 않은 글 조각들이 스무 개나 있었다.
첫 번째 저장글은 영국에 살 때 브런치 구독자수가 100명이 된 것을 기념하려고 쓰던 글이었다. 살짝 소개하자면,
...구독자가 100명이 되면 뭔가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100명이 1000명보다는 적은 숫자이지만 그 백 분이 다 우리집에 놀러오기라도 해봐라. 한 집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이 여자의 글을 꾸준히 읽어보겠다고 누른 것 아닌가. youtube였다면 감사의 먹방이라도 했을 텐데 이건 브런치이므로 글로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간만 흘렀다.
뚜렷한 주제를 드러내는 브런치라면 구독자수의 느리지만 꾸준한 증가가 이해가 될 텐데 내 브런치는 왜 사람들이 읽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쓰는 이유를 살펴보면 대답이 나올 법도 하여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쓰는' 이유는 늘 쓰는 걸 직업으로 해왔고 그게 좋고, 그걸 잘 할 자신이 있고, 잘 한다고 평가 받으며 살았고, 쓰지 않으면 운동 안 한 근육이 간질간질거리듯이 몸과 마음이 요동을 치기도 하고.. 등등등 쓰지 않을 이유는 없다. 즉 읽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100명 돌파에는 어떤 글을 쓰면 좋을까. 짧게 고민하다가 아예 키워드 별로 조금씩 써보면 어떨까 하여 이렇게 노트북을 켜게 되었다...
지금 이 브런치의 구독자분이 500명이 넘어가니까 이런 류의 글을 쓸 기회가 다섯 번이나 있었던 것 아니냐! 그런데 한 번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어...?
마지막 저장글은 3월에 저장된 가장 최근 것으로 <보습>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우리가 보통 보습이라고 하면 촉촉함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내가 쓰려던 보습은 농기구 이름이다.
보습은 원래 '보십(훈몽)'으로 쓰이던 말로 농기구의 술바닥에 끼우는 삽 모양의 쇳조각이다. 그러면 술바닥은 또 뭐냐, 술바닥은 쟁기 끝에 보습을 대는 넓적하고 삐죽한 부분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지금 '보습'이라고 했을 때 순우리말 보습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지 않을까. 어쩌면 일본어에서 온 말일 수도 있는, 국어사전에는 없는 촉촉한 '보습'을 떠올리는 사람만 있지 않을까.
촉촉함과 관련된 낱말 '보습'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다는 걸 알게 된 충격으로 이 얘기를 써봐야겠다, 하고는 작가의 서랍에 넣어두고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사전 속 순우리말 보습1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보습『농업』 쟁기, 극젱이, 가래 따위 농기구의 술바닥에 끼우는, 넓적한 삽 모양의 쇳조각. 농기구에 따라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보습2는 한자어이다.
보습 (補習)『교육』 일정한 학과 과정을 마치고 학습이 부족한 교과를 다시 보충하여 익힘.
이건 누구나 들어봤을 법하다. 보습학원할 때 그 보습.
아니, 그러면 피부보습, 보습로션, 보습미스트할 때 보습은 도대체 어디서 온 말인가? 그런데 일한사전에서 찾을 수 있었다.
ほしつ [保湿]
명사, ス자동사
보습, 습도를 일정 기준 안으로 유지함.
출처:민중서림 엣센스 일한사전
저 한자는 <지킬 보, 축축할 습>이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지만 '보습'이라는 낱말을 한국어사전에선 찾을 수 없고 일한사전에선 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일본어에서 온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같은 주장을 펼치는 그 어떠한 전문가의 글을 찾지 못하는 바람에 '작가의 서랍'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글을 펼쳐놓으면 어느 언어 전문가 분이 슝 나타나서 오노노노 얘야 그건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란다, 또는 오노노노 그건 이렇고 이건 그렇습니다, 라며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씀으로 작가의 서랍 속 첫 번째 저장글과 마지막 저장글을 삭제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