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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Feb 14. 2019

한국인의 무뚝뚝리액션 versus 영국인의 깡통리액션

나라별 맞춤형 리액션

이민한 뒤에 많은 친구들이 런던에 놀러왔다. 꼭 나를 보러온 건 아니지만 런던은,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겐 꼭 와보는 곳이니까. 어쩌면 한국에 살았다면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을 사람들까지도 런던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들에게서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꼈다. 한국에서 만날 땐 몰랐던 것인데 영국에서 만나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리액션에 대한 것이다. 내 말에 대한 리액션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과,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한 리액션을 보였다. 거의 모두가 그랬다. 표정이 없을 뿐 아니라 대답도 없을 때가 많다. 무-리액션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Non-리액션이라고 해야하나.



예를 들어 산책길에 저쪽에서 처음 보는 영국인이 good morning!이라고 하면 나도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한다. 굳이 뒤에 뭘 덧붙여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통성명하자는 게 아니다. 너는 저쪽에서 걸어왔고 나는 이쪽에서 걸어가는데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스쳐지나가게 된다. 그때 그냥 인기척을 할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잠깐 놀러온 친구와 아까 그 산책길을 걷는다면 친구는 이렇게 묻는다.


“너 저 사람 알아?”

“아니 몰라 방금 처음 봤어.”

“근데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해? 난 또 아는 사람인 줄 알았네.”


그러고보니 나는 서울에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게 된다고 해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안녕하세요는 왠지 good morning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뒤에 할말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혹시 안녕하세요가 의문문일 경우도 있기 때문일까? 안녕하세요? 라고 ‘안녕’을 묻는 거라서? 그렇다고 굿모닝을 해석해서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상상할 수가 없다. 누군가 서울 산책길에 나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알려준다면 나는 네? 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이민 후에 수 년이 지나고 한국인의 ‘네?’도 독특하게 느껴졌다. 아마 수 년 전의 나도 늘 서울에서 네? 네? 하고 다녔을 텐데, 이젠 그게 외국어처럼 느껴지는 것도 우스웠다. 네? 는 잘 못 들어서 다시 묻는 게 아니다. ‘나 지금 네가 무슨 말했는지 완전 듣긴 들었는데 지금 네가 그 말을 나한테 무슨 의도로 한 건지는 이해가 안 되니까 다시 말해볼래?’를 함축한 거였다.


하지만 외국에서 누가 산책길에 굿모닝! 했다고 해서 네? 할 수는 없는 일. 영어로 what? 할 수는 없는 일. 그냥 서로 다른 거다. 어디가 맞고 어디가 틀린 게 아니라. 서울에선 침묵이 금이고 영국은 다른 거다.


식당에서 또는 쇼핑 중에도 마찬가지이다. 같이 있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한국에서 온 친구들은 종업원에게 무뚝뚝했다. 아.. 나도 여기에 사는 게 아니라 옛날에 여기를 여행할 때는 저랬겠지.. 하며 민망해진다. 여기 종업원들이 특별히 따뜻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치아 8개를 드러내며 hello! how are you?라고 주문 받는 사람이 말했다면 그건 그냥 주문 받기 전의 빈 깡통 같은 오프닝이랄까, 굳이 아임 파인 땡큐 앤 유,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무표정으로 그 말을 씹어 먹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good.이라고만 해도 서로 민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어를 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눈을 마주치면서 (제발!) 말하면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여기서 종업원들이 많이 하는 말은 Are you alright? 인데 이건 진짜로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백화점 종업원이 이말을 했다면 뭐 찾는 게 있느냐는 뜻일 테고 서점에서 계산을 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이 말을 했다면 ‘이제 나한테 와서 너가 사려는 물건을 계산하도록 해’라는 뜻이랄까. 빵집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있는데 점원이 ‘Are you alright?’이라고 했다면 ‘주문 도와줄까?’라는 정도의 뜻이랄까? 거기에다 대고 I’m alright이라고 하는 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리액션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말하는 사람의 눈을 쳐다보고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도 눈치를 챌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거기에 대답도 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말만 한다면 (이 빵 두 개 줘,와 같은) 그건 최악이다.


내가 외국인이니까 내가 영어를 못해서 그러는 걸 거라고 생각하고 이해하겠지, 뭐, 라는 시대는 지났다. 아이컨택과 미소는 만국공통어 아닐까. 못 알아들었어도, 당장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도, 상대의 오프닝에 굳게 닫힌 입술과 내리 깐 눈으로 답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나는 그 요란하지만 의미없는 오프닝에 이미 익숙해져 어, 좋은 하루를 보냈어, 그리고 나 오늘 이거이거 먹을게. 라고 썩소로 답하거나 개인적으로는 전혀 good한 상황이 아님에도 나도 치아 8개를 선보이며 ‘어어 그래 굿이야 굿굿 땡큐’를 남발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 나도 여기 사람들처럼 깡통 리액션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 느낀다.


그래서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국인의 무뚝뚝함에 ‘좋아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영국에서는 그 무뚝뚝함이 그렇게 민망하더니만..!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당시, 짐을 찾느라 바쁜 내 뒤로 아이가 넘어졌다. 그런데 아마도 같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을 무뚝뚝해 보이는 어느 한국 할머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셨다. 그리고 아이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어머 고맙습니다 제가 짐 찾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네요 감사해요’라고 요란하게 오프닝을 장식할 때도 할머니는 아무 반응이 없으셨다. 무-리액션. 그때 느꼈다. 아 내가 고향에 왔구나! 너무 반가워서 그만 눈물이 터져버린 것이다.


한국의 옛날 광고 노래 중에 이런 게 있었다.


-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영국은 말 안 하면 모른다. 절대 모른다.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영국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5cm짜리 진한 미소, 2cm짜리 옅은 미소, 나는 네 말을 알아들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동그랗게 뜬 눈,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지금 듣고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네모나게 뜬 눈, 굿모닝! 굿굿! yeah yeah 여러 요란한 리액션들을 많이 챙겨오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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