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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Feb 26. 2019

이름을 지켜라

이 글이 그냥 에피소드로서의 기능만 하고 몇 년 뒤에 읽었을 때, 아 그래 이런 답답한 일도 있었지 하하 지금은 안 그래서 참 다행이야,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시민권자인 아빠와 영주권자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는 시민권자이다. 

아이 아빠 이름이 앤드류라서 리틀 앤드류 라는 뜻의 '리앤'이라는 이름을 먼저 지었다. 영어 이름을 지은 건지 한글 이름을 지은 건지 아리송했지만 웬만한 한글 이름처럼 두 글자고, 또 영어 이름 중에 Lianne/Leanne도 있어서 그렇게 결정했다. 실제로는 Leanne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많이 쓰이지만 우리 아이 이름의 뜻은 'Little Andrew'니까 Li+An이 들어간 Lianne이 되었다. 


영국 통계청(ONS)에서 매년 발표하는 '가장 많이 지은 아기 이름'을 보다가 우리 아이가 태어난 해에 Lianne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거의 없어 개인보호 차 아예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 The ONS does not include baby names with a count of two or less in England and Wales to protect the confidentiality of individuals. ) 


한글이름으로도 독특하고, 영어이름으로도 본의아니게 독특해져버린 우리 아이는 이 이름으로 영국에서 4개월을 살았을 즈음에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하게 된다. 영국 여권으로 한국에 입국했고 뒤이어 구청에 가서 아이에게 한국 여권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아이는 복수 국적자이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구청 직원이 내가 제출한 서류의 영어 이름 표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거 이렇게 쓰시면 안 돼요. Lian이 바른 표기입니다. 고쳐서 다시 주세요."


엥? 아닌데요, 저희 아이는 이 이름으로 이미 4개월을 살았고 살고 있는 나라의 의료보험, 출생증명서 등등등 모두 다 이 이름인데 지금 이 이름을 한국에서 바꾸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클로이를 예로 들어보자. Khloe라고 쓸 수도 있고 Chloe라고도 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로마자표기법에 따라 정해진 대로 적어야 했던 것이다. 잠깐. 우리아이는 로마자표기법이 아니라 외래어표기법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닌가? 아 헷갈려. 


한국의 상황을 영국에서 전화로 전해들은 아이 아빠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그 이름을 사수해야 한다면서, 표기가 달라지면 그건 우리 아이가 아니라고, 공항에서 그걸 어떻게 설명할 거냐며 입국 못할 수도 있지 않겠냐며 이름을 알아서 잘 지켜내라는 특명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 때문에 곤혹을 치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 영국 의료 시스템인 NHS에서 아이를 처음 등록했을 때 아이 이름을 Kianne이라고 적어서 서류를 보내왔다. K는 L옆에 있다. 명백한 오타였다. 그쪽의 실수이니 느리지만 순조롭게 수정되었다.


2) 내가 남편을 따라 영국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 배우자 비자였다. 배우자 비자는 말 그대로 신청하는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배우자_let's learn' 정신을 심어준다. 역시 사람은 배우고 살아야 돼.. 그동안 왜 이걸 몰랐지? 하며 겸손해진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비자 서류를 작성하는데 그동안 한국에서 내 이름을 Yeon Hee로 써왔던 것과 Yeonhee로 붙여 썼던 것을 모조리 다 하나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영국인들 눈에 Yeon Hee와 Yeonhee는 다른 사람이니까.    


남의 실수1)든 나의 실수2)든 또 다른 실수를 겪을 순 없었다. 구청 직원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지만 '다름'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구청에서 발급해준 한국인들의 여권 영어 표기와 한국인들의 신용카드 영어 이름이 달라서 생긴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고소를 많이 당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결국 아이의 영국 여권 복사본과 이러저러한 서류에 사인을 하고서야 아이 이름을 사수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청 직원의 말에 '아, 그래요? 고칠게요'라고 반응했고 아이에게 표기가 다른 두 개의 여권을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히드로 공항에서는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영국에 입국할 때 필요한 것은 영국 여권이지 한국 여권이 아니다. 아이는 거기서 영국인이니까.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모르겠다. 한국을 방문할 때 복수 국적자는 인천공항에서 두 개의 여권을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 가끔 한 개의 여권을 보여주고 아이가 출국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여 아이의 양육수당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본데 그것은 불법이다. (요즘엔 복수 국적자들의 리스트를 공항에서도 가지고 있어서 하나만 보여주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은 걸로 알고 있다.) 법을 수호하는 사람의 자녀로서 여권 두 개를 당당히 보여줬는데 거기 적힌 이름이 다르다면? 너님은 누구세요?로 시작되는 긴 취조가 시작되는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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