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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Mar 23. 2019

우리 외할머니

한국 시골의 추억

해외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이 나왔다. 갑자기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나면서 눈알이 붓도록 울었다.

아빠가 아기일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나는 그들의 얼굴도 알지 못한다. 아빠도 딱히 그들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아빠를 통해 들은 이야기도 없다. 아빠가 내가 15살에 돌아가셨으니, 15년을 같이 산 건데도 사실 나조차도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아빠는 당연히 모르겠지.


초우울한 아빠 쪽 가족 이야기와 달리

엄마 쪽은 다르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너무나도 많은 추억과 기억들이 외갓집에 있다.

지금에서야 아빠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어쩌면, 남들이 두 세트로 다 갖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쪽에는 없다는 미안한 마음에 자주 외갓집에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민오기 전까지 늘 서울에서 산 나는

외갓집을 자주 방문한 덕에 시골처녀 못지 않게 농촌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논에서 벼가 나오고 벼가 쌀이 되고 쌀이 밥이 되는 것도 직접 보며 자랐다.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고 외할아버지를 따라 튀긴 뒷다리를 먹어보기도 했다. 닭고기 맛이지만 다시 먹고 싶지는 않은 개구리뒷맛이 있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는 걸 학교 수업 시간 말고 외갓집에서 먼저 보았다.


외갓집이 한옥이라, 아랫목이 따뜻하다는 건 어디서 듣기 전에 먼저 보고 겪었다. 늘 따뜻한 심지어 뜨거운 외할아버지 옆 잠자리는 외할머니가 아니라 손녀인 내 차지였기 때문이다.


누룽지를 새카맣고 나보다 더 커보이는 그 큰 솥에서 떠 먹어 보기도 했고 누룽지를 끓이기 위해 땔감을 넣어보기도 했다.


그 불 안에 개나리처럼 샛노란 고구마를 넣는 일은 어디 모꼬지에 가서 하는 소소한 재미가 아니라 외갓집에 가면 당연히 하는 거였다. 그래서 어릴 때는 속이 샛노랗지 않은 밋밋한 고구마는 상한 건 줄 알았다. 상한 게 아니라 그냥 종자가 다른 고구마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샤부샤부가 (외래어표기법상 샤브가 아니라 샤부가 맞다) 꿩고기를 물에 담갔다 먹는 요리인 줄 알았다. 어릴 때부터 외할아버지가 사냥개 '개리'와 잡아온 꿩을 그렇게 해먹으며 샤부샤부라고 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그냥 얇게 썬 고기를 끓는 물에 데쳐 양념장에 찍어 먹는 요리를 뜻하는 거였다. 무조건 꿩고기였던 게 아니라.


개리와 함께 산에 가서 외할아버지가 총을 쏘는 것도 봤다. 차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셔서 눈앞에서 가까이 보진 못했지만 할아버지가 총을 쏘면 개리가 뛰어가서 총맞은 꿩을 물어왔다. 그리고 자기가 앉을 자리인 트렁크로 알아서 들어갔다. (80년대 이야기이다. 지금이라면 총기 사용이 어쩌고 사냥 기간이 지역별로 어떻게 다르고 또 반려견 관리가 어떻고 아동과 함께 사냥개+사냥총 콤비? 할많하않 시절 이야기랄까.)


또 잡아온 동물들이 여러 마리씩 박제되어 전시되고 있는 시골은 그야말로 자연사박물관이었다. 다람쥐 노루 오리 꿩 등등, 그때는 집집마다 박제된 꿩 한 마리씩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가볍게 두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보기가 어렵다.

박제꿩 몇 마리를 외갓집에서 서울집으로 가져왔다.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엄마가 집안 정리를 할 때 갖다버리라고 해서 들고 나갔더니 그걸 본 경비아저씨가 버리는 거면 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이모부들이 외할아버지가 잡아온 노루의 피를 생으로 먹는 걸 보면서 놀라 울었던 기억도 있다. 지금도 사냥꾼들이 건강을 위한답시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동물의 피는 기생충 감염 위험이 있어서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 역시나 80년대 공포 체험 시절 이야기다.


낚시도 갔다. 부모님 빼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우리 남매. 이렇게 넷이 낚시도 갔다. 할아버지가 잡아온 물고기를 먹다가 가시가 목에 걸려 아프다고 마구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인네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나는 거기서 왜 아프다고 쳐울었을까. 외할머니가 오이를 몇 개 쥐어주며 이거 먹으면 괜찮다고 해서 엉엉 울며 오이를 사각사각 먹다가 정말로 오이를 먹으니 침을 삼켜도 가시가 걸리지 않아 괜찮아졌다. 지금은 어른이라 생선 가시 따위는 잘 발라먹지만 목에 이물감이 들면 오이가 먹고 싶어진다.


늙은 호박들이 이리저리 뒹굴던 시골언덕. 호박을 잘라 호박씨를 숟가락으로 긁어 흙 묻은 손으로 호박씨를 까던 할머니.


먹을 수 있는 풀과 먹지 못하는 풀을 구분하고 냉이를 캐는 방법도 안다. 길가다 만난 뱀, 쥐불놀이, 고양이, 강아지, 토끼, 소, 닭, 병아리, 따뜻한 달걀, 흑염소, 염소똥, 우물, 마중물, 집안이 아닌 바깥에 따로 있는 변소, 그게 싫다면 방안의 요강.. 기억과 추억이 끝도 없다.

중학교 때였나

빨래를 개는 외할머니 옆에서 함께 빨래를 개다가
'할머니 나는 빨래 할 줄 모른다?'라고 말하니 이렇게 답하셨다.


'(충청도 사투리로) 그랴.. 근데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더라..'

빨래도 못하는 손녀가 대학을 가고 컴퓨터를 만질 줄 안다고 하니 그 정도면 아버지 안 계셔도 시집가는데 문제 없다며 여전히 당시 시점에서 안심하시던 두 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혼한다고 인사를 갔을 때
외할아버지는 지금의 신랑에게
너무 피부가 하얗다며 무슨 병이 있냐고 물었다.
신랑이 웃으면서 아니라고 하니까
그제야 침대 밑 모아놓은 과자를 꺼내며
그러면 이거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내 결혼식에는 외할아버지만 오셨다.
외할머니는 계속 아파서 외갓집 안방에 아예 환자용 병원 침대를 들여놓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오래 되다보니 할머니의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결혼식에 외할아버지만 혼자 오셨던 걸 알았을 때
바로 찾아갔어야 했다.
할머니한테 결혼했다고, 전에 인사했던 그 '순사'랑 결혼했다고 사진 몇 장 들고 찾아갔어야 했다.

신혼여행간다고
일한다고
혼자 계시는 엄마 챙기기도 바쁘다고
이런저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핑계로
다음에 다음에 하다가
결국 식물인간 상태인 할머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모든 가족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빠르게 병원에 모였지만 할머니는 움직임이 없었다.
한 두시간이면 이렇게 다 모일 수 있었음에도
우린 모두 너무 늦게 왔을 뿐이다.

자식 모두 키워 서울로 보내고
허전한 시골에 명절마다 모이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는 우리 수다 소리에 시끄럽다 소리치고
할머니는 시끄러워 좋은데 왜 그러냐고 목소리들 듣기 좋다고 놔두라고 소리쳤다.

할머니는 이제 늦게 왔다 소리도 치지 않는 거였다.
할아버지가 우는 것도 그날 병원에서 처음 보았다.
이후 할머니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그날 병원에서만 그리 우셨다.

'이 사람.. 갈 건가보다...' 하시면서.

이모한테 들었던 할머니 이야기가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

'몇 주 전에 시골 갔다왔는데 할머니가 너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시집살이 하고 있냐고 걱정하시더라? 이모가 걱정하지말라고 시댁하고 같이 안 살고 또 신랑이 엄청 잘해준다고 얘기하고 왔어.'

그때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

나와 달리
돌아가신 아빠가

외할머니와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소리를 오늘 꿈에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소리가 나를 무지하게 욕하는 소리였음 좋겠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한 멍청한 바보년이라고
마구 욕하는 소리였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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