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15에 시작하는 storytime의 티켓을 끊으려고 동네 엄마들이 줄을 서 있었다. storytime은 전문가 또는 비전문가가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시간을 뜻하는 말로 주최가 어디냐에 따라 성격과 분위기도 다 다르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곳은 동네 뮤지엄에서 목요일마다 하는 건데 약간의 돈을 받고 한 시간 동안 서너권의 책을 읽어주고 커피, 차, 쿠키 같은 간단한 먹을거리도 제공한다.
이 스토리타임의 티켓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아이가 하나지만 다른 엄마들은 둘셋 씩 데리고 와서 와글와글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티켓팅이 평소보다 오래 걸려서 살펴보니, 계산대에서 지체되고 있었다.
계산대를 맡고 있는 사람은 지적장애인이었다.
이걸 매주 맡아서 하던 친숙한 직원은 아니었고 명찰을 보니 자원봉사자인데 티켓값을 틀리게 말하고, 영수증 끊는 법을 몰라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구하는 와중에 이미 입장 시간이 지난 지 오래.
그런데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아무도 찡그리지 않았다.
아무도 짜증난다는 듯이 또는 들으라는 듯이 한숨쉬지 않았다.
아이들이 바글바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가만히 줄 서 있는 것에 집중하지 못해 난리가 난 상황에서도 내가 들은 건 ‘아 거 좀 빨리빨리 합시다’/‘시간 다 됐는데 빨리빨리 해주세요’/‘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가 아니었다.
Oh.. bless her. 가 전부였다.
계산대 상황을 전해들은 다른 직원이 급하게 와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자 자원봉사자인 그녀는 너무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했지만 직원은 ‘오 아냐 걱정마 괜찮아’라며 상대를 달랬다. 그리고 그녀를 도와, 밀린 티켓팅을 해결했다. 스토리타임은 평소보다 훨씬 늦게 시작했고 끝나기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끝났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랬다. 그럴 수도 있는 거였다. 그랬으면 좋겠다.
라고 거기서 아무도 하지 않을 생각을 추가로 한 건 아마 나 뿐이었을 거다.
몇 년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런던의 빨간 이층버스를 타고 어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 안에서 사람이 쓰러졌다. 버스는 멈췄고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달려들어 도우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쓰러진 사람이 갖고 있던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 그 사람의 가족에게 연락을 했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또 다른 사람은 구급차를 불렀고, 심지어 그 버스가 멈춰선 곳에서 가까이 있던 한 상점의 주인까지 밖으로 나와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같은 노선의 다른 버스가 도착했고 버스 기사는 승객들에게 그 버스로 옮겨 타라고 말했다.
그런데..
다들 오이스터, 그러니까 런던의 교통카드로 다시 찍고 버스를 타는 게 아닌가.
왜? 내 잘못도 아닌데? 저 사람이 쓰러져서 우리 모두가 다른 버스로 옮겨타는 건데 왜 버스비를 내가 다시 내야하지?
라고 생각하는 건 아마도 나 뿐이었던 것 같다. 수십명의 사람들이 모두 군말없이 삑- 삑- 교통카드를 댔고 이 불편에 대해서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