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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페의 알바는 사실 방송작가입니다

by Aeon Park

사람들은 커피를 '수혈한다'고 농담처럼 말한다. 나도 수혈하듯 주야장천 마시기만 했지 만들 줄은 몰랐다가 시골로 이사를 하고 시골 카페에서 알바를 시작하면서 그래도 아메리카노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것에 도전을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 연재를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할까말까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일단 저지르세요, 바로 하겠다고 하세요!



시골 카페에서 시골 아줌마가 설렁설렁 하는 알바라고 생각하면 오산 마산 부산 예산이다. 자신이 없었다. 설렁설렁 할 자신이. 정직하게 파트타임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였고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읍내 보건소에 가서 건강진단결과서(구.보건증)도 받아서 제출하였다. 시골로 이사 온 지 반년이 넘었을 때였는데 공공기관끼리 주소 공유를 하지 않는 건지 시골 보건소 직원이 '선생님, 현재 주소가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이 맞나요?'라고 물어서 서로 놀랐다. 그 사이에 이민 포함, 이사를 몇 번이나 했는데 왜 청담동 주소인가 생각해보니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카페 알바 이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https://brunch.co.kr/@egeve23/213 <- 경력자라는 증거는 여기에서!)

모두 정상입니다

커피를 처음 마셨던 순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을 처음 마셨던 순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처럼 아버지에게 처음 술을 배웠다든가 멋진 해외의 카페에서 커피를 처음 접했다는 따위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하지 못한다. 다만 시골 카페로 알바를 다니면서 느끼는 이야기 정도는 흥미롭게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이런 시골 카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사장님도 나도 늘 의아해서 '놀러오셨어요?' '동네에서 오셨어요?' '고향이세요?' 따위의 질문을 하게 되는데 어느 날은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러 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것도 내가 일하고 있는 문화방송에서. 촬영을 한 지 2주가 지나 이번 주 쯤에는 방송이 될 줄 알았는데 아직 방송 전이라 자세한 얘기를 하지 못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점 정도는 스포해도 되겠지?


사장님은 단 한번도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 자연스럽지 않은 어떤 행위를 한 적이 없는데 알음알음 사람들에게 알려지더니 어찌저찌 정신을 차려보니 연예인들이 카페에 와서 촬영을 하고 있고 결국 방송을 앞두게 된 것이다. 보통은 개인 인별(ig)과 사업장 인별을 멀티 프로필로 구분하는데 사장님은 그것도 하나로 합쳐서 하고 있을 정도로 그리 예민한 유저가 아니었다. 그런 분임을 잘 알아서 예민한 나는 방송에 나가는 것이 어떨지 걱정이 되었다.


- 사장님!! 앞으로 손님들이 너무 많이 오면 어떡해요. 진상들이 와서 화면하고 다르네 뭐네 하면 테러하면 어떡해요. 촬영장비 들어오면 여기 잔디 다 망가질 텐데, 어떡해요. 사장님 얼굴 팔릴 텐데 인별에 애들 사진도 다 있는데 어떡할 거예요오오오!


라고 걱정하는 본업 22년 차 방송작가(aka 카페 알바)의 반응에 사장님은 이렇게 답했다.


- 여기 사시는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두 분에게 추억이 될 거잖아요.


그때, 소싯적에 엄마를 방송국으로 불러서 예능 프로그램에 방청객으로 출연시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 MC가 신동엽이었는데 모든 촬영이 끝나고 엄마는 MC와 함께 사진을 함께 찍었고 인화를 해서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때 환하게 웃던 엄마의 얼굴을 사장님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확정된 카페 촬영. 같이 가서 구경했다면 좋았겠지만 촬영날 가족 여행이 예정 되어 있어서 본캐가 MBC 작가인 시골 카페 알바는 결국 카페에서 MBC가 촬영하는 걸 보지 못했다는 후문. 그 집 알바가 MBC 작가라고 하더니만 다 연결해준 거 아니야? 싶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앤톤이 윤상 '빽'으로 SM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는 무리와 다를 바 없겠다.


나는 가족 여행을 다녀와서 기념품으로 산 누가 크래커를 들고 카페에 출근했다. 건물주님의 촬영 후기를 신나게 들었다. 누구 얼굴이 주먹만 해, 누가 너무 예뻐, 누가 부엌일을 정말 잘하더라, 방송 장비를 실은 차가 10대가 넘게 왔어, 따위의 이야기를 환하게 웃으며 하는 사장님 부모님 겸 건물주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흐뭇했다. (사장'님' 부모'님' 겸 건물주'님'이라니, 앞으로 님님님으로 명해야 할까) 정말 내게 '빽'이 있다면 편집 좀 잘해주세요, 감독님, 우리 어머님 뽀샵 좀 잘 부탁드려요, 얼굴톤은 원래 그러하시듯이 밝게요, 하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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