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살 때는 한국에서처럼 '제철'이라는 걸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사계절 내내 마트에는 블루베리와 라즈베리가 있고 1년 내내 똑같은 감자, 똑같은 당근, 똑같은 오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식탁에 동아시아를 뿌리고 싶다고 하면 약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김치라도 담그려고 하면 저 멀리 중국 마트에 가서 한국에서는 목숨 걸고 피하는 중국산 배추 중국산 무라도 있어야 엄마가 한국에서 보내준 한국산 고춧가루와 버무려 김치맛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특별한 식탁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영국 마트에는 늘 같은 것이 늘 그 자리에 항상 늘 매번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다시 한국 생활에 익숙해져야 했다. 맞다, 이건 이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있는 게 아니었지! 라즈베리와는 확실히 맛이 다른 한국 산딸기를 맛보려면 있을 때 왕창 사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냉동해도 맛이 없으니 있을 때 마구 먹어두어야 또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해외에 살 때 간장게장 생각이 나서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아 이제 별로 안 먹고 싶어졌어, 생각이 들 때까지 입안이 얼얼하도록 간장게장만 먹었던 것처럼 요즘 나는 이 사이에 산딸기 씨가 끼어 불편하든지 말든지 산딸기만 주야장천 먹고 산다.
내가 일하는 시골 카페에도 제철이라는 게 있다. 멋지게 바꿔 말하면 시즌 메뉴. 작년 여름에는 사장님이 집에서 직접 만든 식혜를 판매했던 시골 카페에서는 올 여름부터 수박 주스 판매를 시작하였다. 사장님은 여름이 오기 몇 주 전부터 수박을 '갈갈' 할 수 있는 블렌더 구입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 가격이 '덜덜' 했기 때문이다. 몇 백만원짜리 블렌더를 사면 수박 주스를 한 잔에 십만원씩 받아도 이익이 날까 말까 했지만 결국 어느 날 70년된 한옥 부엌에는 딱딱한 얼음도 시원하게 갈아주는 최신 맷돌이 들어왔다.
영국에서 아이를 키울 때 시판 주스를 잘 먹지 않았던 우리 아이가 어느 날 Joe & the Juice에서 파는 주스를 잘 마시는 걸 보고 나서 백화점에서 착즙기를 샀던 나. 그러고 나서 설거지옥에 빠졌던 내가 떠올라 순간 아.. 안 돼...(뵨사마 톤)할 뻔했지만 다행히 이 최신 맷돌은 착즙기와는 달라서 설거지옥이 아니었다는 사실. 휴! 여름 신메뉴에 고생하는 전국의 알바님들 파이팅.
태국 땡모반 아니죠, 한국 수박 주스 맞습니다.
요즘엔 각종 시럽에 설탕도 다양한데 우리 사장님은 오로지 수박으로만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다보니 수박각각의 당도에 따라 맛이 살짝씩 변하는 일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맛이 자연스러운 수박 주스가 완성되었다. 이밖에도 커피를 드시지 않는 어르신 손님들은 보통 따뜻한 대추차를 주문하는 일이 많은데 날이 더워지면서 '시원한' 대추차가 가능하냐는 질문이 많아졌다. 이러한 질문들이 모여 모여 전격적으로 '아이스 대추차'도 제조하기에 이르러 지금은 아샷추 아니 아대추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사장님은 또 국산 보은 대추만 고집을 해서 충북이 고향인 친정엄마를 둔 내가 괜스레 대문자 F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사장님 고집쟁이 기질 멋있어..
올해 장마는 예년에 비해 길다는 예측이 나온 가운데 수박주스와 아대추의 판매량이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만들고 있으니 많은 주문을 기대해본다. 사장님이 부자가 되어야 나한테 소주도 사 주고 맥주도 사 주고 할 것 아닌가. 훗
*아대추는 제가 이 시리즈에서 임의로 지은 이름이고 실제로는 이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지 않으니 검색은 안 해보셔도 됩니다. (수줍은 알바로부터...)
**의외로 대추보다 훨씬 더 비싼 것은 몇 알 올리지 못하는 가평잣이므로 남기지 말고 꼭 다 드시기를. 중국산 아니죠, 국산입니다.
***브런치 키워드에 '잣'을 넣고 싶었는데, 잣은 없고 혼'잣'말은 있다. 잣에 대한 글이 많지 않은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