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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Sep 07. 2020

뱉어? Better?

틀렸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도 맞다고 말하기

우리 아이는 예정일보다 3주 이르게 태어났다. 임신했을 때는 '나도 완모라는 걸 해볼까?'라고 야심찬 계획을 세워보았지만 출산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입원해있던 영국 병원에서는 이미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있었다. 아이가 작게 태어나면 살을 찌우기 위해 분유를 섞여 먹일 것을 권유한다. 그리하여 계획과 달리 일찍 태어난 아이는 계획과 달리 혼합 수유를 하며 자랐고 또 올해는 계획과 달리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나 "뱉어! 뱉어!"

아이 "Better?"


이런 답답한 대화는 영국에 살 때도 흔했다. 내가 아이에게 무엇을 뱉으라는 뜻으로 말하면 아이는 Better로 들었다. 혼합 수유에 이어 이제는 혼합 언어라고 해야 하나, 이중 언어라는 말도 하던데 난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 전문 용어들은 잘 모르겠다.



내가 남편의 한국행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나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이의 언어였다. 한국어가 저리 더듬더듬해서야 어떻게 친구를 사귀나, 어떻게 유치원을 다닐 거며, 금방 초딩이 될 건데 국어책은 어떻게 읽을 것이냐 등등. 그러나 한국살이 3개월만에 그것이 군걱정이었음이 드러났다. 자기가 언제 수년 동안 Better than Saturday[배터 댄 새터데이]라고 발음했냐는 듯이 [배rrrㅓ댄 새rrrrrㅓ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어도 놀랄만큼 유창해졌다. (아이는 영어유치원에 다니지 않고, 일반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이 유치원엔 원어민 선생님이 없는데도 아이가 영어 시간에 배워온 RRRR발음은 그 어떤 원어민의 RRRR보다도 더 미끄럽다)


한국에 와서 정한 규칙이 있다. 아이가 뱉으라는 말을 Better로 들어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영국 발음으로 [배터]라고 하던 것을 갑자기 유치원 친구들이 하듯이 [배러]라고 말해도 틀렸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도 맞고,'라고 말하고 다시 말하기로 한다.


주변 친구들은 아이의 영국 발음이 점차 사라지는 걸 안타까워한다. 나도 아주 괜찮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는 않기에(+나도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기에)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영국식 발음만 고집하라고 하는 것도 어쩌면 아이에겐 고통일 거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다 [배러]라고 하는데 그 와중에 혼자서 [배터]라고 할 수 있는 깡은 없을 거다.


지난 세월 해외에서 생존영어로 살다보니 발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활이 걸린 중요한 회의를 이끌어나간다거나 하면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데에 발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얼마나 조리있게 잘 전달하느냐가 더 중요했지, 배터든 배러든 심지어 사투리까지 섞인 영어까지 난무해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요즘엔 아이의 '영국 영어'가 아니라 '영어' 자체가 점차 사라지는 걸 느낀다. 길어지는 코로나 사태로 영국 발음이라는 가느다란 줄을 세게 잡고 있을 여력도 없다. 난 교포도 아니고 원어민도 아니다. 멀어져가는 영어를 한국에 살면서 잡아두기는 쉽지 않다.


아이는 3세까지만 해도 한국어를 알아들었다. 말을 잘하는 3세가 되고 자기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엄마만 쓰는 언어인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민자 엄마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끝까지 모국어로만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아이가 못 알아듣는 게 안타까워 영어로 말하거나이다. 나는 후자였다.


그리고 2020년이 되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정에 없던 역이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의 경우엔 내가 영어를 했던 것이 현재로선 아이에게 독이 아니라 득이 되었다. 계속 영국에 살 거니까, 하면서 영어는 신경쓰지 않고 한국어만 했다면 지금 수준의 영어도 하지 못했을 거 같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p)


 

손목이 뭔지 몰라서 Smoke[ㅅ뫀]라고 썼다


서점에서 영어쓰기 책을 한 권 샀다. 영어를 가르치려고 산 게 아니다. 우리 아이 같은 처지(이중언어자?)에 있는 아이들이 공부할 만한 교재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른'을 위한 한국어 교재는 다양했지만 '어린이'를 위한 교재는 그렇지 않았다. (참고로 국립국어원에서는 2019년에 재외동포 유아를 위한 교육자료를 출판한 적이 있지만 우리 아이는 더 이상 유아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국어 교육 책이 아닌 영어 교육 책을 사버렸다. 필기해야 하는 말은 아이가 쉽다고 느끼는 영어이지만 그걸 쓰려면 한국어 예문을 알아야 하는 식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이 역시, 나는 그냥 엄마이지,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맞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가 거부감없이 따라오고는 있다.  


어제는 이런 대화를 했다.


아이 "몰러, 아파"

나 "어디가 아픈지 몰라?"

아이 "아니, 몰러 몰러 아파! 으앙"

나 "어디가 아픈지 알아야 어느 병원을 갈지 아는데.."

아이 "몰러! MOLAR!"


어금니(molar)가 아프다는 말이었다. 첫번째 어금니가 나올 시기가 되었나보다. 몇 년이 지나면 아이는 molar라는 낱말은 아예 잊고 어금니라고만 말할 거다. 그때가 되면 난 분명히 이 불통(不通)을 그리워할 거다.





*두서없이 썼더라도 나처럼 이중언어 아이를 한국에서 키우는 사람들이 참고할 만한 내용이 한 줄이라도 있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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