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 아이와 함께 한국행 비행기에 탔을 때였다. 함께 탔던 중년의 무리가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자기들처럼 해외여행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우리는 해외에 살고 있는데 가족을 만나러 잠시 한국에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런 말이 들려왔다. ‘아, 국산이 아니야? 섞였어?’
내 아이는 한국인이지만 해외에서 나고 자라서 그럴 수도, 또는 눈이 큰 아빠를 닮아 그럴 수도, 아니면 어색한 한국어 사용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보니 혼혈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때 우리 엄마는 옆에서 꽤 크게 화를 내신다. 엄마 뇌에서는 ‘혼혈=튀기=부정적’ 이렇게 반응하는 느낌이랄까. 엄마에게 요즘 사람들에게 혼혈 같다는 말은 개성 있게 생겼다는 뜻과 비슷해서 딱히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 너무 화내지 마시라고 둘러대었다.
그런데 이 혼혈이라는 말, 예전부터 어색하다고 느꼈다. 아이가 혼혈도 아닌데 혼혈이라는 말을 듣는다는 게 불편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낱말이 이상하다. 우리 모두는 다 ‘혈’이 ‘혼’되어 있는 거 아닌가? 엄마 피+아빠 피 섞여서 우리가 되었으니 다 혼혈인데 굳이 인종 따져가며 혼혈인가? 혼혈 같이 생겼네? 해야 할까. 유전자 검사를 한다면 혼혈이 아닌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싶다. 요즘엔 하프, 쿼터혼혈이라는 말까지 한다. 이제는 어떤 피에 얼마나 지분이 있는지 수학적으로 따지는 건가? 또 혼혈이라고 해서 다 눈동자색이 갈색이 아닌 것도 아닌데 컬러렌즈를 혼혈렌즈라고도 하고 최근 생방송 인터뷰에서는 혼혈의 반대되는 뜻으로 ‘100% 순종 한국인’이라는 말까지 나와 버렸다. (순종의 반대말은 잡종이다.)
피 섞임이 없이 혼자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혼혈의 반대말이 순혈이고 혼혈과 비슷한 말이 잡혈인 것만 봐도 혼혈이라는 낱말은 말맛이 불쾌하다. 분명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표준어이지만 쓰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리사 언니는 미국/한국 사람이야.
이니스는 스리랑카/독일 아이야.
영국인 피비는 할머니가 한국인이야.
해외에서도 섞였다는 표현에 대한 토론은 있어왔다. 우리가 바닐라, 초콜릿 반반 아이스크림이냐며 ‘mixed’라는 말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왔고 지금은 multiracial, biracial, multiethnic 등의 다양한 표현을 들을 수 있다. ‘유색 인종’도 생각해봐야 할 표현이다. 투명인간이 존재한다면 유색 인종도 인정할 거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유색 인간이다. 무색 인간이 없다면 유색 인간도 없어야 한다. 애초에 백인 중심적인 사고를 했기 때문에 유색 인종이라는 말이 나왔을 터, 사전 속 유색 인종의 뜻풀이는 백색 인종을 제외한 모든 인종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질문도 해볼 수 있을 거다. 방송인 사유리의 아들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의 아들은 그냥 ‘아들’ 아닐까? 스스로 혼자 낳기로 결정한 당사자의 선택을 존중한다면 ‘그녀가 서양인의 정자를 기증 받아 아들을 출산했다’고 해도 충분히 뜻이 통했을 말을 굳이 ‘그녀가 서양인의 정자를 기증 받아 혼혈 아들을 출산했다’고 하지는 못할 것 같다. 배우 류승범의 딸도 마찬가지다. 그가 처음 딸을 공개했을 때 '혼혈 딸 공개'라고 제목이 붙었다. 글쎄다. '류승범 딸 최초 공개'라고만 했어도 되지 않나?
지난 여름, 십년 가까이 한 해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 넷플릭스에는 해외 넷플릭스에선 못 보던 태국 드라마들이 있었고 한 배우에 눈이 가 찾아보니 '태국/미국 아빠'와 '태국/중국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올해 태국에서 방영 예정이라는 <태국판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 배우를 한국 미디어에서 다룬다면 아마 혼혈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터. 그의 이국적인 외모가 주는 궁금증 때문에 ‘굳이’ 그걸 언급해야겠다면 ‘혼혈’ 대신 할아버지가 미국인인 태국 배우 정도로 표현해주면 좋겠다. 요즘에 누가 '혼혈 가수 인순이'라는 말을 하나, 그냥 '가수 인순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