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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Mar 02. 2021

나는 누구인가

소녀가 아가씨가 되고 아가씨가 아줌마가 되는 것처럼, 

지난 십년 동안 나를 가리키는 말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나는 남편을 방송을 통해 만났다. 하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영국에 사는 사람을 전화로 인터뷰하게 되었고 몇 년이 지나 그가 한국에 방문하였을 때 다시 연이 닿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연애도 결혼도 한국에서 했기 때문에 해외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그렇게 나는 ‘결혼이민자’가 되었다. 배우자 비자를 받아야했기에 뒤늦은 혼인 신고를 했던 기억이 있다. 혼인신고를 한다는 건 공식적인 문서로도 ‘미혼’이 아니라 ‘기혼’이 되는 거였다. 


그렇게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 이번엔 내국인에서 ‘외국인’이 되었다. 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한국 환경과 달랐기에 처음 몇 개월은 티비만 봤다. 꽃병Vase이 베이스가 아니라 바즈인 것에 익숙해질 때쯤 매번 돈을 내고 배우자 비자를 연장할 수는 없으니 영주권 시험을 보기로 했다. Life in the UK라는 시험과 영어 시험을 치르고 그렇게 나는 ‘영주권이 있는 외국인’으로 신분을 바꾸었다. 영주권이 있다고 해서 개인적인 일상이 더 편해진 것은 없다. 비자 연장을 안 해도 되니 돈이 안 드는 것 말고는. 


내 성씨는 그대로였지만 영국인들은 나를 ‘미세스 킴’으로 불렀다. 미스터 킴의 아내이니까. 그러다가 아이를 낳으니 이번엔 ‘미스 킴의 엄마’가 되었다. 미스 킴이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자연스레 ‘학부모’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외국인 엄마’였지만 같은 학년 전체 28명 아이 중에 11명이 외국인 엄마였기에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살다보니 BTS의 인기로 나더러 한국인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러다가 동네 청소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기회가 왔고 그렇게 ‘한국어 선생님’ 타이틀도 얻게 되었다.    


작년 2월,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어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하였다. 당시엔 대구 코로나 사태가 터졌던 때라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한국에 가는 걸 우려했다. 그때만 해도 영국에서의 코로나는 중국과 한국 정도에만 있는 뉴스 속 얘기였다. 출국 준비를 하면서 영국의 한 가게에서 마스크를 사려고 하자 건설 현장에 쓰는 먼지 방지 마스크가 필요한 거냐며 되묻던 직원이 생각난다. 없으면 됐다고 대답하던 나도 한국의 코로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오랜만에 만날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만 했다.


한국에 도착하자 나는 ‘해외입국자’라는 신분이 되어있었다. 그땐 코로나 검사도, 자가격리하는 일도 없었고 가족들이 마중을 나와도 괜찮았다. 작가협회에서 하는 건강검진을 예약했었는데 입국한 사람이라면 2주 뒤에 나와야 한다며 예약한 일정을 바꾸어주었다. 뒤늦게 국내 분위기를 깨닫고 2주 동안 자발적 자가격리를 했고 출국하기 며칠 전에야 치과, 피부과, 건강검진 등을 바삐 다녔다. 


3주 한국 일정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한국에서 입국한 사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영국 학교에서는 아이 등교를 미룰 수 있냐고 물었고, 나는 바로 어제 호주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들어온 다른 친구는 오늘 학교에 갔다는데 왜 1주일 전에 들어온 내 아이는 학교를 못 가게 하냐며 따졌다. 그때만 해도 여전히 자가격리에 강제성이 없었다. 학교에서도 우리가 아이를 보낸다고 결정했다면 법적으로 못 오게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WHO에서 지정한 위험국가에 호주는 없지만 한국이 있었기 때문에 싸움 대신에 또 다시 자발적 자가격리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격리 도중에 록다운이 시작되었다. 남편은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key worker(핵심 인력/필수 근로자)였고 밖에선 사람들이 무서운 속도로 죽었다. 아이 친구의 가족들이 죽어갔고 (영국의 코로나 관련 사망자는 3월 현재 143,000명이다) 코로나와 관련 없는 죽음도 경험했다.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우리는 영국 생활을 접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지난 여름, ‘역이민자’가 되었다. 아이는 한국에 살아본 적이 없어서 리턴한 것이 아니지만 ‘리터니’라는 신분이 새로 생겼고 나는 다시 ‘해외입국자/내국인’이 되었다. 몇 달 만에 돌아온 한국은 코로나 검사와 자가격리가 필수였고 또 몇 달이 지나자 영국발 변이 바이러스라는 말이 뉴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입국한지 오래되었어도 우리가 영국에서 왔다는 말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조금 있으면 그 친한 친구의 첫 번째 기일이다. 좋은 친구, 존경받는 경찰 등 훌륭한 이름표가 있던 그였지만 다 제쳐두고 자살자라는 태그가 그를 계속 맴돈다. 나는 어떨까. 지금의 나는 무엇일까. ‘입국자’라는 태그는 시간이 지나면 떼어지겠지만 다음은 무엇일까. 중요한 건, 남들이 붙인 꼬리표보다 내가 붙이는 이름표라고 믿고 싶다.  


*월간 방송작가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브런치에 같은 글을 올리는 지금, 현재 영국 사망자 수를 수정해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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