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이 죽었는데 하나도 슬프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연예인이 죽어도 눈물이 났는데 아무렇지도 않고 심지어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한 죄책감도 전혀 없다.
그가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수요일 오후였다. 몇 달 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엄마의 말이 실제였음이 드러나고 며칠 뒤였다. 친구와 전화통화도 잘 하고 옆집 아줌마의 수다에도 곧잘 대답하던 엄마는 이상하게 내말에만 안 들린다며 짜증을 냈다. 잘 안 들린다고 하니 목소리를 키워서 이야기를 해주면 이번엔 자기한테 목소리를 크게 낸다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엄마는 정기건강검진을 받고나서야 그것이 나에게만 한정적인 짜증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실제로 귀가 50%밖에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물이 반 정도 채워져있을 땐 반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잘 들리던 귀가 반밖에 들리지 않는 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다. 반반씩 따지자면 결국 한쪽 귀의 청력을 완전히 잃은 것과 다름없을 테니까.
이비인후과에서는 보청기를 권유했다. 보청기는 일반형 190만원 부터 시작해(한쪽 가격을 뜻한다, 귀는 두 개니까 곱하기 2를 하면 된다) 최고급형 615만원까지 기능과 종류가 다양했다. 같은 제품이더라도 그것이 프리미엄 충전기이냐, 스탠다드 충전기이냐에 따라 값이 다시 달라졌다. 보증기간은 2-3년이고 사용기한은 쓰기에 따라 5-10년이라고 했다. 마치 안경 같은 거라서 수시로 찾아와 점검을 받아야 하고 지금 귀 상태에도 가격 때문에 망설이다가 착용 시기를 놓치면 귀는 점점 더 나빠져 아예 못 듣게 될 수 있다는 주의사항까지 들었다.
이 정도 이야기면 우리집에선 평화로운 것에 속한다. 어떤 보청기를 고를지, 성형외과 상담사 못지 않게 솔-을 유지하며 어머니 어머니 하던 간호사의 전화를 막 끊고 고민을 하고 있던 때, 큰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큰이모가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경우는 단 하나이다. 동생인 우리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을 때.
-여보세요. 이모! 엄마 지금 제 옆에 계신데 통화 중이라서 못 받았을 거예요. 이모한테 전화드리라고 할게요.
-그래. 이모부 '갔다'고 전해라.
이모의 남편이 우리집에 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모의 남편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피멍이 든 이모를 엄마가 집으로 데리고 왔다. 개새끼 소새끼 욕을 하면서 당장 이혼을 시킬 거라며 화가 난 엄마가 이모의 멍든 몸을 카메라로 찍으며 말했다. 폭력의 증거를 수집 중이었던 거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없을 때니까 그 사진은 사진관에 가서 인화를 했어야 했고 우리 가족이 아닌 사람이 봤을, 봤어도 뭐 별 말 하지 않았을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이었기에 그랬을까. 가정폭력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음에도 언니는 동생에게 단 한마디 하지 않았다. 멀리 사는 것도 아니고 지하철 서너 정거장 거리. 동생은 어쩌면 가까이 살고 자주 보는 언니의 몸상태를 모르고 있었던 것에 더 화가 났을 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욕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교회 집사인 엄마 입에서 어색하게 개새끼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왔으니까.
사진을 찍히고 다친 몸에 약을 바른 이모는 그대로 누워서 며칠을 잤다. 아빠를 암으로 잃은지 얼마 되지 않아 이모부가 때려서 다친 이모를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2모는 나한테 두번째 엄마 같은 존재이니까 그를 증오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가 죽은 것이다. 하나도 슬프지 않다.
6살 아이에게 할머니가 어디 좀 갔다가 며칠 뒤에 온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어서, 큰이모할머니한테 원래 남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죽어서 그렇다고 했다.
-죽었으면 bow해야겠네?
장례식에 데리고 간 적이 한번도 없는데 아마도 티비에서 본 모양이다. 어, 가서 절도 해야 하고 잠도 거기서 자야해.
- 엄마는? 엄마 슬퍼?
아니. 엄마는 하나도 안 슬퍼.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나쁜 사람이 죽은 건 안 슬픈 거야.
드라마나 영화라면 이런 말을 하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거나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혀. 드디어 끝났구나 싶기까지 하다.
숱한 가정폭력에도 그와 헤어지지 못한 이모였다. 경제적인 것이었을까? 아이들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중간에 그가 산으로 들어가서 자연인 생활을 하는 바람에 서류 정리를 할 수 없었던 걸까? 모르겠다. 이제와 그녀에게 캐묻는 것도 의미없다. 그는 그녀의 표현대로 '갔다'.
작년에야 그의 생사를 듣게 되었다. 어디 지방 요양병원에 드러누워있다고, 요양사들에게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이모도 그가 그러고 있다는 이야기를 작년에야 들었단다. 엄마가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이모와 통화를 할 때마다 주워들은 바로는 그렇다.
그런데 그를 돌보아주던 요양사들과도 무슨 문제가 있었나보다. 법적으로 뭐가 얽혀있나본데 아마도 돈 때문일 것이다. 서류 상 남편인 남 때문에 이모는 작년부터 얼이 빠져있었다. 그리고 그를 수십년 만에 다시 보러갔다. 자식들과 그를 보는데 그가 이모를 모르는 척 했다. 얼굴이 열두번은 더 바뀌었을 자식은 알아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얼굴 그대로 늙기만 했을 이모는 모르는 척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버럭 화를 냈다. 그걸 믿어? 꼴에 할말은 없나보네, 쌩 깔 줄도 알고. 우리집에서 피멍이 든 등을 보이며 아프다고 하던 이모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이모도 화를 내지 않고 자식들도 화를 내지 않으니 나라도 화를 내야겠다. 개새끼 소새끼 미친새끼.
그가 간 날은 이모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끝까지 진상이다.
장례식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식 중 하나가 가지 않겠다고 선언해 엄마가 화를 냈지만 나는 그런 엄마에게 도리어 화를 냈다. 놔두라고, 자기 아빠 장례식에 자기가 안간다는데 엄마가 무슨 참견이냐고. '그래도, 그래도' 엄마는 며칠 지낼 짐을 싸면서 자꾸 이 말을 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새끼 죽여버린다고 욕하던 90년대의 그 엄마는 어디로 갔을까. 그 새끼 때문이 아니라 이모 때문이라고, 이모가 혼자 있으니까 그렇지, 라고 되뇌는 엄마에게 엄마가 있으니까 됐다고, 코로나 시국에 사람 더 부를 것도 없고, 며칠 더 있을 것도 없으니까 마스크랑 팬티나 간단히 챙겨서 다녀오시라고 했다.
분하다. 이모 등짝의 피멍은 나았어도 그 속은 다친 채로,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미안하다고 했어도 열받고 어디서 객사했다고 전화가 왔어도 열받았을 거다.
그는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가 가정폭력범과 자연인 사이 그 어느 중간 지점을 살아낼 때다. 저 인간이 입에 담을 낱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용서. 그 지점에도 여전히 어렸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모가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선 못 물어볼 것 같다. 20년 정도 더 지나면 용기가 생길까, 이모. 나는 이모처럼 될까봐 무서웠어. 엄마처럼 될까봐도 두려웠어. 때리는 남자, 병으로 죽어버린 남자, 어느 쪽이든 혼자가 되는 게 너무 무서워. 이모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혼을 안 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그냥 너무 어이가 없는 채로 하루하루 살아내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지나간 건 아닐까 싶어. 나도 그렇게 되면 어쩌지? 이렇게 1년, 10년 지나고 연락도 끊기고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게 되다가 나중에 나중에 그가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해버리면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시간이 늦었다. 하품도 나왔다.
하품을 하자 눈물이 조금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