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혼자 갔다가 함께 오는 길
처음엔 기분 좋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거 재미있을 거 같아. 사람들도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할 거 같아.'
그런데 사진 몇 장 미리 올려놓고 끼적이기 시작한 지금은 자신이 없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거 안 되겠는데? 아무도 관심 없을 거 같은데?’
혼자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그냥 사라지는 게 아까웠다.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까웠다. 아침, 집 앞 학교에 아이를 걸어서 데려다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10분. 그리고 오후에 다시 혼자 데리러가는 그 10분. 여기서 핵심어는 10분일 것 같지만 아니다. #혼자 가 핵심어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른이라면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을 갈망한다. 아이를 학교 정문으로 들여보내자마자 시작되는 나의 자유시간. 그리고 아이가 학교 정문으로 나오자마자 끝나는 나의 자유시간. 그래서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까웠나보다. 이제 막 시작됐는데, 이제 막 끝날 건데, 이 자유시간을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물건들이 있었다. 누군가에겐 쓰레기가 되고 나에게는 글감이 되는 그런 물건들이 길에 늘비했다.
근방에 초중고가 다 있다보니 문제집 쪼가리가 날아다니는 건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불에 탄 문제집이 굴러다니는 건 좀 이상하다. 시험을 못 봐서 화가 난 학생이 라이터로 문제집에 불을 붙이는 상상을 해보았다.
우리나라는 실패를 했을 때 다른 길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자살을 하는 거라고.
틀려도 괜찮다고, 이 길이 아니면 저 길로 가면 된다고, 아이들도 어른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다양한 다른 길이 제시되는 나라였음 좋겠다.
우산 손잡이였을까, 아니면 지팡이였을까.
자유시간에는 별 게 다 궁금하다.
비 오는 날, 이 우산을 들고 가다가 하필 손잡이가 톡 부러져 비를 다 맞고 출근하는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아니다. 손잡이만 부러진 거니까 비는 안 맞았을 수도 있겠다. 손잡이가 없는 우산을 엉성하게 들고 갔을 그 사람은 손잡이를 가방에 넣을 생각은 왜 못했을까. 왜 여기에 손잡이를 버려두고 갔을까.
알라딘이 쓸 것 같은 모자를 쓴 꼬마요정이 나무에 붙어있다. 이럴 땐 옆에 아이가 없는 게 아쉽다. 꼬마요정이 너한테 들킬까봐 '얼음'을 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이는 최근에 '얼음땡'을 배웠다. 영국에서 하던 tag과 비슷한 거라고 말해주니 그럼 '땡'은 뭐냐고 해서 한참 설명해야했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땡'을 받지 않았는데도 마음대로 움직여서 얼음땡을 처음 해보는 우리 아이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개입하지 않았다. 룰브레이커를 알아내는 것도 결국 네가 할 일이지 뭐.
불 타는 시험지 이후에 또 다른 충격적인 물건이었다. 청소년의 실내화 한 짝. 지비츠가 하나 붙어있음으로 인해 주인이 확실히 있다는 걸 알아서 더 외로워보인다. 나보다 발이 큰 이 실내화는 며칠 동안 이 자리에 있었다. 결국에 쓰레기통으로 간 건지, 주인을 찾아간 건지는 모르겠다.
한국에 와보니 학생들은 실내화가 많이 필요했다.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다 실내화를 요구했다. 실내화 주머니도 종류별로 있어서 책가방과 짝을 맞춘 것도 있고 또 어린이가 들어도 되나..싶은 고가 브랜드의 주머니들도 많았다. 나는 아이가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해서 잘 들고 다니지 않는 이름 없는 천가방에 실내화를 넣어주었다. 1학년 1학기를 그렇게 보냈지만 잃어버리지 않았고 2학기가 시작되려는 지금, 아이 아빠는 우리 아이의 실내화 주머니가 다른 아이의 실내화 주머니보다 fancy하지 않다고 불만을 드러내더니만 결국 브랜드가 박힌 실내화 주머니를 사왔다. 나는 남들하고 아이를 똑같이 키우고 있지 않다. 내맘대로 내소신대로 키우고 있기에 남편이 사온 실내화 주머니를 학교 실내화 주머니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빠가 사준 건 학원 실내화 주머니로 들고 다니라고 했고 2학기에도 '언제 잃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천가방을 손에 들려줄 생각이다. 브랜드가 아닌 후줄근한 주머니가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자유시간은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되지만 집에선 또 다른 할일들이 눈에 띈다.
내가 아끼는 시간은 바로 이 시간이다.
학교를 바래다주고 집에 혼자 오는 길.
아이를 데리러 혼자 학교에 걸어가는 길.
그 시간이 이상하게 더 소중하다.
다음 주가 아이의 개학이다. 내가 아꼈던 이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매일 다니는 똑같은 길에 널브러진 여러 다른 이야기들이 다시 시작된다.
의미있는 걸음이고 싶다.
내 눈에만 보이고 내 머리에서만 쓰여지는 그 이야기를 듣는 그 시간이
의미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