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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on Aug 26. 2021

별거 446일째

'별거'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 별거 : 부부나 한집안 식구가 따로 떨어져 삶


나는 남편과 446일째 따로 지내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적어보기로 한다. 곧 백신을 맞을 예정인데 혹시 내가 잘못되면 이 타임라인이 내 아이가 커서 갖게 될 의문을 풀어줄 지도 모르겠다.


2011년. 남편의 어머니가 박터지게 반대를 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남편이 살던 아주 작은 오피스텔에서 잠시 지냈다. 주소를 옮기진 않았다.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혼인신고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오피스텔은 아주 불편했다. 작아서가 아니다. 그 오피스텔로 남편의 어머니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누가 문이라도 두드리면 걱정이 되었다. 결혼 전부터 그가 살던 곳이었으니 언제든지 방문해서 내 머리채를 잡을 것 같았다.


2012년.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갔다. 이때 비자 때문에 뒤늦은 혼인신고를 했다. 해외이사는 결혼 반대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는 떠나고 싶어했다. 내 일은 한국에 있었지만 일부는 그만두고 일부는 방송국의 배려로 해외에서도 원고를 쓸 수 있었다.


2014년. 아이를 낳았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만 바라보던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애정이 전부 다 아이에게로 갔다. 모유수유도 가능하면 자기가 하고 싶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우울해졌다. 아이와 남편, 저 둘 사이에 내가 없다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2015년. 집을 샀다. 한국과 달리 전세 개념이 없는 해외 생활, 나는 월세를 매우 아까워했다. 남편은 이 나이에(어리다는 뜻으로 말한 거였다) 벌써 집을 사서 뿌리를 내리면 어떡하냐고 반대를 했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 마음이 살짝 바뀌었는지 결국 구매를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Bell's palsy(얼굴마비)를 겪었다. 이사 들어오기 전에 남편은 가장 친한 친구인 이안과 함께 페인트칠을 했다. 아이의 돌잔치 겸 집알이를 새 집에서 했다.


2016년. 브렉시트 투표를 했다. 결과가 나왔고, 이 나라에 사는 것이 한국에 사는 것보다 좋은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계속된 밤근무로 남편도 매우 지쳐있었다. 그는 얼굴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거 같다며 우울해했다. 어머니와 화해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매년 물어오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2018년. 아이가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의 부담이 더 커졌다. 이번엔 내가 반대를 했던 사립학교 지원이었지만 남편은 본인이 다녔던 학교에 아이를 넣고 싶어했다. 가정경제에 부담은 되겠지만 존중하고 싶었다. 적어도 아이는 적응을 잘했고 인기도 많았다.


2019년. 남편은 조심스레 기러기 생활을 제안했다. 자긴 남고 나와 아이가 한국에 가면 어떻겠냐는 거였다. 기러기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자기는 혼자 있고 싶은데 왜 말을 안 들어주냐며 여권과 짐을 싸서 몇 주 동안 사라졌다. 그 사이에 아이는 열이 39도까지 올랐고 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하던 생활을 꾸역꾸역 이어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말도 없이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우울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았다.


2020년. 브렉시트가 단행되었고,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었다. 남편 친구 이안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였다. 난 동생이 결혼을 해서 한국에 가야했다. 그런데 한국은 위험하다며 남편은 동행을 거부했다. (당시엔 신천지 사태가 있었다) 그러고는 미국에 있는 지인들을 만난다며 미국행 티켓을 구입했다. 살면서 단 한 번 밖에 만나지 않았던 사람들을. (이 말도 안 되는 전개는 아마 죽을 때까지 용서할 수 없을 거다. 나에게 죽을 때까지 아주 잘해줘야 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남편 없이 아이만 데리고 친동생 결혼식에 참석을 하고 돌아오니 남편은 10년 동안 대화를 하지 않고 지내던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한국에 갈까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미국도 못 갔다. 당시 트럼프가 하늘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휴직을 했다.


그해 여름, 한국에 쫓기듯 왔다.

한국에 가면 어디서 살 건지 물었을 때 그는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나에게 해줄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일단 아이와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그가 몇 년 전에 따로 있고 싶어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446일이 지났다. 이혼을 한 것도 아니고 등본에 함께 들어와있는 것도 아닌 모호한 가족관계가 시작되었다. 거리두기 4단계인 지금, 우리는 오후 6시가 넘으면 아이와 함께 셋이 앉아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다. 같은 주소에 있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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