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가 난다는 게 이런 건가
지금 맡고 있는 방송을 워낙 오래했다보니 (2003년부터 썼다) 내가 처음부터 이 방송만 한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친한 친구들 조차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내 첫 방송은 라디오가 아니라 티비였다.
아직 대학교 졸업을 하지 않은 4학년이었지만 한 프로덕션과 일할 기회가 닿아 막내 작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면접을 볼 때 메인 작가가 어느 프로그램을 가장 인상 깊게 봤느냐고 물었고, 몇 년 전에 보았던 인터뷰 프로그램이 기억나서 그걸 대답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프로그램을 집필한 작가님이셨다. 메인 작가에 대한 사전지식이 하나도 없이 간 면접이었는데 뭐 이런 경우가. 그렇게 운명적으로 친절한 작가님들을 만났고 많이 배웠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 프로덕션에 들어가서는 3번의 아침 토크쇼 녹화를 했다.
1) 당시에 인기가 많았던 자사 아나운서들
2) 우리나라 첫 여성 장군
3) 팝페라 가수
1)의 아나운서들은 몇 달 뒤에 내가 정식으로 아나운서국에 취직을 하게 되면서 다시 만났고
3)은 당시에 10대였는데 방금 찾아보니 서른 다섯이란다. 이럴수가.. 그런데 왜때문에 얼굴이 똑같죠.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2)를 녹화할 때이다. 아무래도 장군님을 모시는 자리였기 때문에 군대도 가보지 않은 주제에 군기가 바짝 들어있었다. 녹화 들어가기 몇 분 전, 장군님이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이럴수가. 군복에 구멍이 난 거였다. 그것도 방금 만들어진 구멍이...
알고 보니 당시 의상을 담당했던 분이 군복을 조명 가까이에 걸어두었고 조명이 워낙 뜨거웠던 관계로 군복이 타버렸던 것이다. 워낙 큰 실수를 목격하게 되면 (그것도 대한민국 장군을 상대로!) 그게 내가 한 것이 아닌데도 내가 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더 나아가 혹시 내가 그러라고 말한 건 아닐까 아니면 사실은 진짜로 내가 그렇게 한 거 아니었을까, 하고 별 생각이 다 든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내가 한 게 맞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방송 작가는 글만 쓰지 않고 방송 전반에 대해 꿰고 있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코디 분이 군복을 받아들었을 때, 조명 가까이에 옷을 거는 걸 봤어야 했고, 그걸 제지했어야 했다.
그때는 막내 핑계를 대며 <나는 모르는 일이오>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총체적 관찰, 주시 능력이 기르고 길러져, 왼손으로 아이 숙제를 봐주고 오른손으로 저녁을 지으며 뒤에 달린 눈으로 티비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생방송도 아니고 게스트로 장군님이 온 것도 아닌데 좀 여유를 갖고 살아도 될 것 같지만 많은 방송 작가들이 내 말에 공감해줄 게다. 그게 잘 안 된다.
그건 우리가 보고 겪은 수많은 실수들의 흔적이라 함부로 바뀌어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내 아이가 저지르는 실수들을 어느 그림책에서 본 것을 인용해 'Beautiful Oops'라고 표현한다. "책 옆에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물통을 함께 넣었더니 책이 다 젖는 Beautiful Oops가 생겼네? 다음엔 뚜껑을 잘 닫자"처럼 말하는 건데, 그랬더니 실수에 쉽게 좌절하던 아이도 본인의 실수에 좌절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실수로 얻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좌절과 부끄러움이 아니라 <다시 실수하지 않을 용기와 자신감>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난 3월 초.
다행히 아이에게 <멋진 아이고!> 패키지를 열어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은 이 패키지가 아예 가방에 들어 있지 않아도 전혀 불안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