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제목을 <주워지지 않는 생리대>라고 썼는데 이걸 <주어지지 않는 생리대>의 오타로 잘못 인식되는 일이 있을까 저어되어 바꾸었다. 요즘 저소득층 여자 아이들을 위한 생리대 후원이 활발해서 그럴 수 있겠다. 하지만 이건 아무도 주지 않는 생리대가 아니라 아무도 줍지 않는 생리대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 주 수요일이었던 거 같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쯤 됐다.
아이와 함께 걸어서 5분 거리의 학교를 가고 있는데 바닥에 생리대 포장지가 있었다. 겉포장지가 아니라 속포장지.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당신은 생리대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거다.
영어로는 sanitary pad wrapper다. 생리대는 처음 겉포장을 뜯고나면 낱개포장된 생리대가 여러 개가 들어있고 그 낱개포장된 생리대 하나를 꺼내 팬티에 붙이고 나면 껍질포장이 남는다. 이 포장도 쓰임새가 있다. 사용한 생리대를 버릴 때 그 껍질을 이용해 다시 재포장해서 쓰레기통에 버리게 되어있다. 그 껍질에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있어서 사용한 생리대가 남에게 보이지 않게 잘 여밀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을 때 참고하면 좋은 사이트
https://www.wikihow.com/Dispose-of-Sanitary-Pads
다시 등굣길로 가보자. 누군가 생리대를 사용하고, 남은 그 껍질을 아무데나 버렸구나 생각했다. 또는 그 근처에 쓰레기통이 하나 있는데 일반 도로의 쓰레기통이 아니라 종량제봉투를 이용해서 버려야만 하는 그런 쓰레기통? 암튼 거기에 버렸을 때 어떻게 하다가 실수로 하필 사용한 생리대 속포장이 떨어졌고 그게 길에 놔뒹구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생리가 뭔 지는 알아서 (사실 '생리'는 모른다. 'period'는 안다) 그 포장을 보자마자 '악! 누가 이걸 여기 버렸어!'라고 소리를 질렀고 나도 남이 사용한 생리대 포장지는 만지기 싫어서 발을 이용해서 영차영차, <종량제 봉투를 이용해서 넣어야만 하는 쓰레기통> 근처로 그 포장지를 옮겼다. 그러면 나중에 쓰레기통 근처를 치우시는 분이 치우겠거니 생각했다. 그 길의 유동인구는 어마어마한데 이걸 봤을 여자들이 얼마나 불쾌했을까, 남자들은 뭔지 모를 경우가 아는 경우 보다 더 많을 테니 넘어가고.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2미터를 걸어가자 이번엔 그 포장지가 잘 감싸고 여미고 있었어야 할 <사용한 생리대>가 발견되었다... 으악. 미안. 엄마가 저거까지 내 발로 옮기는 건 못하겠어...
그렇게 아이는 학교에 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그 사용한 생리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분명히 사용된 흔적이 보이고, 그걸 다행히(?) 휴지로 잘 돌돌 말긴 했지만 겉포장지가 분리되어 버린 것이었다. 내가 26년 동안 생리하면서 늘 생각하던 게 하나 있다면 도대체 그 포장 스티커는 왜 그렇게 작은 거야?!! 좀 크게 만들 수 없어? 그러면 잘 붙어있었을 거 아냐 ㅠㅠ
다음 날.
내가 겨우 옮겨놓은 포장지는 쓰레기통 근처에서 이리저리 여전히 날아다니고 있었고 휴지로 돌돌 만 생리대도 그 무게 때문에 날지는 못했지만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휴지가 젖어서 사라지는 건 이제 시간 문제였다. 이런 건 어디에 문의를 해야하나. 주민센터에 말해야 하나. 그냥 너님이 주우세요, 할 거 같은데. 나도 안 한 생각은 아니지만 자꾸 촉박하게 아이를 데리러 가다보니까 비닐장갑이랑 비닐봉투를 가지고 나오는 걸 잊는다고.
그 다음 날.
등굣길에 또 생리대를 보았고 비를 맞아 휴지는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돌돌 말린 상태였다. 하지만 저게 펼쳐지는 일 역시 시간문제였다. 저 쪽에서 한줄기 빛이 보였다.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길을 청소하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요! 여기 생리대가 스러져있어요! 어서요! 빨리! 병원... 아니 쓰레기통으로!!.. 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스러지다 :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다.
주말이 있었고 바로 오늘 월요일.
등굣길에 그 생리대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완전히 펼쳐진 상태로. 아아... 아저씨.. 어찌된 건가요. 왜 안 주우셨어요... ㅠ 금요일 하굣길에 내가 챙겼어야 했다. 등굣길에 미화원만 믿고 있었던 게 화근인 걸까. 하필이면 금요일에 아이가 학교에서 크게 다쳐서 피가 나고 난리가 나는 통에 버려진 생리대를 신경쓰지 못했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내가 이따 하굣길에 반드시 비닐장갑과 쓰레기봉투를 챙겨서 그걸 줍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서다. 그동안 그 길을 걸었을 수많은 출퇴근러, 학생들, 심지어 미화원까지 아무도 줍지 않았으니 내 차례이다. '남이 하겠지'의 남이 바로 나다.
그걸 줍다가 어머 웬일이니 생리대를 왜 여기서 만지고 있어, 라는 시선 따위는 하나도 두렵지 않다. 다행히 나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 아니다.
다만 누가 썼을지도 모르는 생리대인데, 코로나 시대에 위험한 일이지만 도저히 이 일을 일주일 이상 끄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월요일 오후, 그 생리대는 길에서 치워질 것이다.
왜 길에 쓰레기통이 많지 않은지 모르겠다. 쓰레기통을 QR코드로 관리한다는 기사도 본 것 같은데, <종량제 쓰레기봉투가 없어도 버릴 수 있는> 일반 거리 쓰레기통만 가까이 있었어도 내가 그걸 주워서 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으로는 으아아아아 소리를 내고 손으로는 손세정제를 들이 부으며 비비대더라도. 지난 며칠 동안 그걸 들고 집까지 걸어갈 용기는 없었다.
뱀발
* 이 글은 -생리대 포장지 스티커 크게 만들어주세요. -길에 쓰레기통 더 설치해주세요. 따위의 메시지를 표출하는 사람과 같은 시설에서 제조된 글입니다.
* 그 생리대가 직사광선을 피하고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보관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 농산물 원료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벌레의 영향을 받기 쉬우니 포장이 파손되지 않도록 보관에 유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부정 불량 현상 신고는 국번없이 DI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