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 살지 않는다는 것

그 참을 수 없는 편견의 가벼움에 대하여

by Aeon Park

나는 시민권을 받을 계획이 없다. 베네수엘라처럼 나라가 망해서(?) 여권 이슈를 해주지 않아 아무데도 갈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영국인 남편을 따라 시민권을 받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지인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 나는 한국인인데, 가족도, 친구도, 일도, 맛있는 음식도, 덕질하는 연예인도 한국에 다 있는데 뭐하러 한국을 외국으로 만드나. 싫다.


그런데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영주권이든 시민권이든 본인이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는 것을 너무 자랑스럽게 여기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영국 생활이 불편하지 않게 최소한으로, 영주권을 받고 살고 있는 걸을 의아하게 여기며 혹시 시민권 자격이 안 되는 거니, 도로 묻기도 하고, 아니, 자격은 다 되는데 국적을 바꿀 이유를 도통 모르겠는데, 라고 답하면 또 뭐가 있겠지.. 말을 못하는 거겠지.. 라는 반응이다.


거기에 런던에 살지 않는다고 하면 편견 한 스푼이 더 추가된다. 분명히 런던이 아니라 런던 근교인데도 끝까지 자기 회사는 런던이라고, 자기 집은 런던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그런 사람들은 메신저 프로필부터 빨간 이층버스 사진으로 바꾼다.


수 년 전에 한국인들이 모이는 그룹에 나간 적이 있다. 한창 얘기하고 있는데 어디 사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때는 런던 근교 서리(Surrey)에 살고 있어서 서리에 산다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어? 거기 런던 아니잖아요. 였다. 제가 지금 '특별히' 런던 사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온 건 아니잖아요? 지금 여기 런던 산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 주소가 런던이 아닌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궁금하다. 그럼 하시는 일은..? 내가 장담하는데 내가 이거 대답하면 당신은 나에 대한 편견이 또 하나 더 생길 거다. 저요? 방송작가예요. 이어지는 답들은 다 똑같다. 연예인 누구 아냐, 예능 프로그램이냐, 어느 방송사냐, 16년 동안 한결같이 똑같았다. (흥미롭게도 영국인들의 대답은 다르다. 영국인들은 방송작가라고 하면 어떤 글을 썼는지, 요즘엔 어떤 주제로 글을 쓰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를 궁금해한다. 이어서 자기가 썼던 글, 쓰고 싶은 글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서울에는 특별함이 붙는다. 서울특별시. 거기서 태어났고 거기서 학교 다녔고 거기서 놀았다. 혹시 나도 한국에 살 때 거기는 서울이 아니잖아요, 라는 말을 했던가 싶다. 아니, 안 그랬는데. '특히'나 강남 출신이라는 건 내가 편견에 사로잡혔다기 보다는 나를 편견 속에 가두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성형수술을 했을 것이다, 사치품에 관심이 많을 것이다, 외제차를 탈 것이다, 명품 가방이 있을 것이다, 돈이 많을 것이다 등등 결혼 반대에 부딪혔던 여러가지 셀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도 내가 강남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생산해 바치는 강남 사람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오해가 있었고 아직도 풀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는 나라를 바꾸면서 이번엔 수도가 아닌 곳에 살아보니 이것도 편견이 있는 거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지만 편견덩어리인 사람들도 못지 않게 만났다. 나는 영국에서 한국차를 탄다. 여태 영국에서 한국브랜드의 차를 타는 한국인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분명 어딘가 있을 텐데 공교롭게도 아직 못 봤다. 폐차시켜야 할 것 같은 차인데도 외제차였다. 이런 사람들은 한국차 타는 나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왜 외제차 안 타?


안 그런 한국인이 더 많이 살고 있는 영국일 텐데(라고 믿고 싶다), 이렇게 글자로 써 놓으니 후련하기도 민망하기도 하다. 다른 나라에 가기 전에 인천 공항에 버리고 와야 할 것은 용량이 초과된 물통, 눈썹칼, 건전지 그리고 오만과 편견이다. 편견을 뛰어넘는 내용의 런던 공연들은 열심히 관람하면서 실제 삶에 대입시킬 줄 모르는 오만한 사람들, 장애인과 소수민족이 등장하는 영국의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아이가 편견을 갖지 않았으면 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영어를 잘했으면, 이라고만 생각하는 일방통행부모들. 남의 삶에 브렉퍼스트놔라 브런치놔라 하지 말고 자기 삶을 돌아보는 해외생활이 되기를. 여기는 서울 산다고, 외제차 탄다고 중산층인 나라가 아니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이것이 영국 중산층의 첫 번째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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