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한국어 선생님이 되다
나도 고등학생 때 덕질을 해봤다. 티비에 나오는 어느 가수가 너무 좋아서 방송국도 쫓아간 적이 있고 졸업 후에는 우연히 그 가수를 만나서 술도 같이 마시고 그랬다. 요즘 애들의 덕질을 모르는 바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내가 지금은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영국에서.
시작은 친구였다. 호주인에서 지금은 영국인이 된 (국적을 바꿨다) 친구가 있다. 한국인들이 모여 살아서 굳이 영어를 배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그런 동네에 그 친구가 살았다. 어쩌다보니 한식에도 빠졌고 김연아의 나라에서 피겨경기를 직접 보고 싶다며 평창 겨울 올림픽에도 혼자 다녀왔으며 영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학원에도 등록해서 다녔다. 그러다가 뭔가 집중적인 과외가 필요하다고 여겼는지 나에게 과외를 부탁했던 것이다.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매주 펍에서 만나 한국어교재를 가지고 공부를 했다. 몇 달 뒤 이 친구는 한국어능력시험TOPIK에 합격했다.
이 친구가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에서 파리로 놀러가는데 같은 열차의 테이블에 한국인들이 앉았단다. 아마도 모녀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세 명의 한국인들은 앉자마자 '귀엽게 생긴 남자애네' '얘도 파리가나봐' '혹시 한국어 알아듣는 거 아냐'라는 말을 한국어로 쏟아냈는데 친구는 참지 못하고 '네! 한국어 할 수 있어요!'라고 한국어로 답하고 자기가 그동안 배웠던 모~~~든 한국어를 총동원하여 대화를 하며 파리에 갔다고 한다.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들이 많이 산다는 영국의 한 동네도 그렇고, 런던도 그렇고, 런던에서 파리 가는 기차 안도 그렇고. 한국인은 어디에나 있는데 내가 사는 곳엔 아직 나와 내 가족 뿐이다. 그래서일까, 블루오션이다. 경쟁자가 없다. 그냥 걸어다니는 게 홍보인 거다.
동네 커피숍에 갔다. 커피를 내려주던 직원이 조심스레 묻는다.
- 혹시 한국인이니?
- 응? 어. 나 한국인이야. 어떻게 알았어? 내가 한국인처럼 생겼어?
-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물어봤어. 내 조카가 BTS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번 런던 공연 티켓을 못 구해서 엄청나게 슬퍼하고 있거든.
- 오, 그래? 안타깝네. 요즘 BTS가 정말 난리더라.
솔직히 말하면 BTS가 가수인 것만 알았고 몇 명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열풍이 한국인 보기가 런던 BTS 공연 티켓 구하기 만큼 힘든 이 동네에도 불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봤다. 나 이 동네 사는 한국인인데, BTS 좋아하는 사람들 여기 많지? 한국어 배우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아주 간단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K pop에 빠져있는 아이들의 엄마들에게서 연락이 왔고 현재 3명의 영국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로체스터에 이사온지 3년인데 여태 이 생각을 못하고 집에서 심심해하고 있었다......
- 한국인들은 Asian이라고 하면 한국, 중국, 일본인 같은 민족을 이야기하는 줄 알아.
- 정말? (영국에서 Asian은 인도인을 뜻한다. 동양인은 East Asian이다)
- 한국에서는 숫자를 셀 때 손가락을 접으면서 세.
- 하하하 정말? (한국식으로 숫자를 세어본다) 아우.. 너무 힘든데?
- 우리는 손가락을 펴면서 세는 게 더 불편해 ㅎㅎ
꼭 언어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한국에서 사는 것이 꿈이 이 아이들에게 (13~15세) 알려주고 싶은 것들이 많다. 감이라는 과일이 있는데 가을에 먹을 수 있고 익으면 물렁물렁해진다는 이야기에 끔찍하다고 하는 아이들이다.
- 아니야, 아보카도 같은 거야. 처음엔 딱딱한데 익을 수록 물렁해지고 맛있어.
- 으웩! 그만해! 과일이 물렁해진다니.. 혹시 썩은 거 아니야?
영국 슈퍼에서는 감을 팔기는 하는데 서양인들이 주 소비자는 아니다. 나 같은 사람들이나 수십개씩 싹쓸어오는 거지. (+중국인, 일본인 등등) 시식 행사가 한국만큼 잦지 않은 영국에서 유일하게 감은 시식행사가 잦다. 껍질도 안 까고 사과처럼 잘라서 먹어보라고 하는 영국 슈퍼 직원들. 내가 가르치는 이 영국인들은 나중에 한국에 가서 어떤 편견에 부딪히며 한국 생활을 하게 될지 걱정이 앞섰다. 한국에 대한 큰 기대는 줄이고 상처로부터 막아줄 작은 방패는 키운다는 게 나의 수업 목표이다.
수업시간에 김을 가져간 적도 있다. 아이들이 싫어했다. 이럴수가! 김은 웬만하면 좋아하는데.. 한인마트는 커녕 중국마트 하나 없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라 그런 것 같다. 한국인이 많은 동네에서 함께 크고 자란 아이들은 김밥 정도는 먹어봤다고 말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아주아주 매운 걸로 인기만점인 한국라면이 영국 슈퍼에도 들어온다. fire chicken 볶음면. 이걸 하나 끝까지 끝내는 걸로 서로 내기도 한다는데 한국 음식에 대한 오해가 생길까 걱정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 동네 슈퍼에서 한국 라면을 볼 수 있다는 게 어디냐는 생각도 든다. (여기서 한인마트는 차로 1시간 거리)
자녀가 한국에 관심이 많고 K pop을 매일 듣고 하다보니 그 부모들도 자연스레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애들이 한국가서 산다는데 어쩌겠나. 언어라도 배우게 도와줘야지. 한 학생의 아빠는 손흥민이 있다는 팀의 골수팬인데(미안하다.. 그 축구팀 이름도 나는 모른다) 서니보이가 어쩌고 저쩌고 나를 볼 때마다 손흥민의 골 장면을 동영상을 보여주고 시간을 보내느라 과외 시간을 빼앗기도 한다. 딸의 눈치를 듬뿍 받고서야 알았어 알았어 가면 되잖아 하고 그제야 나간다.
한 엄마는 김치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우고 싶단다. 이 김치 얘기는 우리 아이가 다니고 있는 사립학교 엄마들에게도 해당된다. 내가 한국인인 걸 알고 혹시 김치 만드는 걸 배울 수 있냐고, 안 되면 레시피라도 알려줄 수 있냐는 엄마들이 있다. 내가 김치를 한국의 친정 엄마에게 받아서 먹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서 먹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Sure, 언제든지.
누구 멤버가 어디 소속사이고 어디 출신이고 몇 살이고 키는 몇이고.. 나보다 아이들이 더 잘 안다. 한번은 동요를 불러줬다.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라고 했더니 이미 아는 노래란다. 한 아이돌의 노래 중에 이 가사가 있단다. 아, 그래? 너희 정말 굉장하다..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사는 꿈을 꾸듯이 나도 꿈을 꾼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내가 냈던 에세이를 영어로 번역해주면 좋겠다는 꿈.
아직 아이들에게는 말 안 했다.
아이들이 홍시를 먹으면서 정말 맛있었다고 할 때까지 기다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