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Lisboa
기왕 늦어버린거, 좀 더 밤을 즐겨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LX Factory를 뒤로 하고 찾은 곳은 Daca De Santo Amaro. 정박해있는 요트들과 흥겨운 분위기의 식당들이 강을 끼고 나란히 이어진다. 하지만 이 날은 '이래가지고야 운영이 되겠어?' 싶을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었다. 여름엔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이 많다는데, 아무래도 지금은 겨울이라 그런 것 같다.
이 곳의 매력은 거대한 다리의 모습을 가까이서 감상하며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다리와 가까운 쪽으로 이동할수록 음식값이 비싸진다고 하니 그 부분은 일종의 자릿세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이 곳을 소개해준 분의 말을 빌자면, '다리 아래에서 밥을 먹는건 거지들이나 하는 짓' 이라고 기겁을 하며 다리와 가장 먼 쪽에 자리를 잡기를 원하는 어르신들도 만난 적이 있다고.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생각이란게 다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또 제각각인 것 같기도 하다. 모두가 다 내 생각 같지는 않다는 점이 세상 살이의 즐거움이자 어려움일 것이다.
조금 더 이동해 며칠 전에 마주했던 벨렘 탑을 다시 찾았다. 그 때의 벨렘 탑은 몹시 우중충했었는데, 다시 만나보니 '테주 강의 귀부인'이란 수식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우아했다. 노란 조명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뽀얀 탑은 고고한 달을 닮아보였다. 같은 장소가 이렇게나 다른 느낌을 풍길 수 있다니! 늦은 시각 덕에 우리끼리만 조용하게 탑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이래저래 무척이나 황홀한 경험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실수로 놓쳐버리는 것은 없는지, 포르투갈에서의 소중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난다. 덕분에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점점 늦어지고 있다. 잠을 줄여가며 시간을 보낼 정도로 여행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울 줄이야. 누군가가 말하길 여행이 좋은 것은 여행지에서는 돈을 벌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 했지만 정말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내가 지금 느끼는 동동거림이 일터로 돌아가기 싫어서, 오로지 그 때문이라면 그것도 너무 슬픈 얘기다. 그건 내 삶의 대부분을 회사가 통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잊고 있던 감성은 새로운 풍경 앞에서 불쑥 나타나곤 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마도 그런 감성과 마주하기는 어려울테지. 또다시 야무지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 살아야 할 것이다. 사실은 그게 싫어서 일상으로 돌아가기가 싫다. 그런 일은 옳지 않다고, 그런 말은 좀 심하다고, 나는 괜찮지 않다고, 그러니까 더 이상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고 소신껏 얘기할 수 있는 일상이라면 또 모를까.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오늘 읽던 책을 억지로 덮고, 야밤에 마시고픈 커피도 참고, 하고픈 말의 절반도 못 되는 대화를 얼른 마무리하고 적당히 잠자리에 들어야하는 생활 속에서 감성이 발현될 겨를은 없다.
여행을 통해 한번이라도 평소의 나와 여행지에서의 내가 다르다는걸 깨달았다면 돌이킬 수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는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 여행이 무섭고도 대단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알던 것보다 사실은 내가 좀더 감성적이고 좀더 예민하고 좀더 유약한 사람이라는걸 깨닫고나면 그 이후의 삶은 무척이나 달라진다.
하지만 아직은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돌아갈 날짜는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다. 야속할 정도다. 부디 오늘 밤이 길기를. 날짜가 더디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