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Lisboa
유럽, 포르투갈, 그리고 리스본을 방문하는 이들은 대개 오래된 것들을 보고자 한다. 사실 리스본엔 대지진 이후에 새로 지어진 것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조차도 다들 오래된 편이어서,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거리 풍경을 감상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이니 새로운 것들은 계속 생겨난다. 그리고 그 새로운 것들은 대개 '무국적'의 특성을 띈다. 일부러 작정하고 국적을 지웠다기보다도 이제는 그 나라만의 독특한 특성이라는게 생각보다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련되고 멋지긴 한데 리스본까지 와서 꼭 이런델 가야하나? 서울에도 이런데 있을 듯?' 이라고 되물어왔을 때, 그 불만을 타파해줄 만한 대답은 애당초 있을 수가 없다.
잠시 리스본을 찍고가는 이들은 더더욱 일정에 쫓기기 때문에 이 것도 아니고 저 것도 아닌, 리스본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니느라 바쁘다. 서울에도 있을 듯한 것들을 만날 시간은 없다. 하지만 기껏 리스본까지 와놓고서 이 곳의 새로운 것들, 그러니까 이 곳의 현재를 마주하지 않은 채, 과거의 것들만 골라 주무르고 간다는 것도 왠지 좀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우리에게 LX Factory 방문은 신의 한 수였다. 아주 오래된 것들로만 채워진 것 같아 보였던 리스본에도 새로운 것들은 생겨나며, 새로운 이야기 또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이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이어지며 살아 숨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LX Factory는 1864년에 지어진 섬유 공장 건물들을 특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이 곳은 일종의 상가 단지로, 제각각의 개성 있는 가게들이 모여있다. 제법 큰 서점과 가구 브랜드의 쇼룸,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과 바, 앤틱숍, 세련된 이발소와 옷가게에 모델 양성소, 독특한 아이디어 상품들이 몰려있는 팬시샵, 포르투갈스러운 잡화점, 코르크로 만든 상품들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공방 등이 줄줄이 이어진다. 이렇듯 곧잘 어울리는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가게들이 한데 모여 꽤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게들은 물론이고 외부의 그래피티들도 볼 만한 것이 많아 안팎으로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흐른다.
루프탑 바에 앉아 한숨을 돌리며 커피를 마시다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한껏 들뜬 젊은 친구들이 우리와 같은 것을 마시면서 동시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다. 같은 곳에 앉아 같은 커피를 마시고 있어도 그들의 세계를 엿들을 수가 없다니. 물론 그건 단순히 언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럴 땐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이 새삼 실감난다.
그들의 세계에 끼어드는 것은 포기하고 눈 앞의 풍경을 즐겼다. 이 바를 대표하는 벌거벗은 여인상은 강 건너의 크리스투 헤이와 정확히 마주보는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한다. 예수상과 똑같은 포즈를 한 채 마주보고 있는 형상이 하필이면 여인, 그것도 벌거벗은 여인이라니. 이런 발상을 해낸 그 누군가는 꽤나 응큼하면서도 재치있는 사람이었으리라.
LX Factory에 여러 재미난 가게들이 많지만 그래도 이 곳을 대표하는 공간은 바로 Ler Devagar라는 이름(‘천천히 읽기’ 라는 뜻)의 서점이다.
포르투의 렐루 서점이 고풍스럽고 감성적인 장소였다면, 리스본의 Ler Devagar는 무척이나 현대적이고 세련된 장소로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 곳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공장’과 ‘서점’이 얼마나 매력적인 한 쌍으로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공간이었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공장을 활용한 카페는 한국에서도 몇 번 봤지만 서점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점은 공장의 예전 인테리어를 거의 그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바닥도 계단도 철판으로 되어있어 걸을 때마다 서점답지않게 제법 시끄러운 소리가 났고, 포르투갈의 인기 주간지 <Expresso>를 인쇄할 때 쓰였다던 윤전기도 여전히 그대로 놓여있다. 하지만 천장 끝까지 닿은 거대한 서가에 책들이 빽빽한걸 보면 이곳은 분명 서점이다.
서점 한 쪽은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즐길 수 있게 카페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며 책을 들여다보는 이들로 붐비고 있었다. 누군가는 책에 뭔가 흘리거나 묻히지 않을까 싶어 약간의 노파심이 발동하기도 했는데 제지하는 직원도 없고, 다들 개의치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다. 물론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심지어 이 공간에서는 흡연도 가능한 듯 했다.
흡연에 대해 좀더 사회적으로 관대했던 시절엔 다들 연기를 뿜어대며 책을 읽고 글을 썼었다. 그 시절엔 학교 앞 카페에 앉아있으면 한 마리 너구리가 되어 너구리굴 안쪽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는 그런게 크게 문제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꽤 오래도록 희뿌연 시절을 보냈고 가까스로 그 시절을 통과한지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불과 몇 년 사이에 금연 열풍이 번지며 이젠 그런 풍경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어느덧 나의 그 시절 또한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 같다.
서점을 둘러보다 포르투갈의 아줄레주와 그래피티를 주제로 한 사진집과 전통 포르투갈 음식을 따라 만들 수 있게끔 자세히 설명해둔 요리책을 구매했다. 이토록 책이 많은 공간인데도 직원들은 무슨 책이 어디에 있는지를 대강 알고 있는 수준을 넘어서, 요리책 중 영어로 된 것은 이 것뿐이며 나머지는 다 포르투갈어로 되어있어 알아보기 힘들거라는 설명을 덧붙여줄 수 있을 정도로 책들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었다.
요즘 한국에도 재미난 컨셉의 독립 서점이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고 있는데, 대개는 아기자기한 규모다. 이쪽은 이렇게 큰 공간을 모두 서점(먹을 거리도 일부 판매하지만)으로 활용하다니, 이게 유지가 될까 싶을 정도로 꽤 큰 규모여서 더욱 인상적이었다. 책 역시도 온라인 구매가 더 저렴한 마당에 서점은 더 이상 '책을 파는 곳'이라는 의미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서점은 그 방문 자체가 새롭고 환상적인 경험어야 하며, 기꺼이 발품을 팔아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어야 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기꺼이 방문하고픈 서점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기에 정말 좋았다.
책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장.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공중에서 소녀가 쉼 없이 자전거를 타고 있어 자칫 삭막할 뻔 했던 공간에 재미있는 쉼표가 되어준다. 소녀는 앞으로도 쉼 없이, 그리고 끝 없이 자전거를 탈 것이다. 우리의 여행도 그러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