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미의 역사
내가 책 읽기와 글 쓰기를 취미로 한지는 꽤 오래됐다. 글씨를 또래보다 빨리 깨친 덕에 우리 부모는 얘가 혹시 천재가 아닌가 기뻐하며 일치감치 집을 책으로 가득채웠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아빠는 학구적인 사람으로, 항상 책을 읽고 있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동생은 그닥 그렇지 못한 걸로 보아 모두가 동일한 영향을 받는 건 아닌 것 같다. 동생은 심지어 몸 쓰는 일을 좋아해 체대로 진학했다.)
책을 좀 읽으라고,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고들 흔히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데 책 읽기와 글 쓰기가 삶에 정말 도움이 될까?
내일 학교에 가야하니 그만 자라는 엄마의 명령에 몰래 이불 속에서 책을 본 기억도 있는 걸로 보아 책을 읽는 일이 즐거웠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일이 반복되며 시력을 완전히 베렸지만 그 때는 너무 재미있어서 읽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글을 쓰는 일도 독후감으로 시작하게 됐다. 빈 노트를 차곡차곡 채우는 일도 무척 좋았다. 다만 일기를 쓰는 것만큼은 싫어하는 수준을 넘어 혐오했던 기억. 나의 하루를 기록한다는 것도 싫고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야 한다는건 더 싫었다. 일기야말로 아날로그식 SNS나 다름 없는 존재가 아닌가. ‘참 재미있고 보람찬 하루였습니다’라고 꾸며대는 대신 일기도 적당히 독후감으로 떼우며 매번 위기를 모면해나갔다.
물론 취미는 즐거움을 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사실 나조차도 책 읽기와 글 쓰기가 내 인생에 어떤 자양분이 되어주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둘이 직접적으로 내 인생에 도움이 된 일이 있기는 있다. 그건 바로 대학 진학. 남들은 수상이니 외부 활동이니 하는 것들을 잔뜩 첨부해서 원서를 쓰는 상황에서 나는 그닥 제출할 업적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찰나, 내 독서 노트의 존재를 알고 있던 문학 선생님이 그 노트들을 제출해볼 것을 권했다. 지원하는 학과가 문예창작과도 아닌데 과연 이런게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도움이 되든 안되든 그건 니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일단 뭐라도 내"라는 조언. 당시 1년에 100권 정도의 책을 읽었었고 그 책에 대한 감상을 빼곡히 정리한 노트는 세 권 정도 되는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운이 좋았다. 당시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고등학교 답지 않게 제법 그럴싸한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남들보다 쉬이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이 있어 독서 노트를 제출해보라는 조언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
면접에서는 내내 나의 독서 생활과 독서 노트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최근 1년간 읽은 책 중 가장 감명 깊은 책이 뭐였냐는 질문에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와 <깊이에의 강요>라고 답했던 기억. 지금 생각해보면 ‘쟤가 뭘 알고서 좋다고 하는건가?’ 했을 것 같기는 한데 비둘기 덕분인지 깊이에의 강요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나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글이 아니라) 숫자로 표현하고자 하는 학과에 성공적으로 진학했다(!)
이후 수 차례 이사를 하며 그 독서 노트들의 행방은 묘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