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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예 Jun 08. 2020

취미에도 암흑기는 있다 / 상

1차 암흑기

대학에 진학한 후, 가장 좋았던 것은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 앞서 언급했듯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에 있던 도서관도 보통은 아니었지만 대학은 차원이 달랐다. 쉴 새 없이 책을 빌리고 반납하면서 전투적으로 읽어나갔다. 여기서의 '전투적'은 책을 닥치는 대로 빠르게 읽었다기보다는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 읽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인데 전공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다보니 공부도 책 읽기도 멈출 틈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은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심해졌는데, 전공 공부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 책을 읽는다면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못할 상황이었으나 읽고 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둘을 병행하느라 그 시절의 난 늘 피곤했다.


공부를 해야할 때는 공부가 아닌 모든 것, 심지어 방청소마저 즐겁다고 하는데 난 그 때보다 공부의 늪에서 벗어난 지금 읽고 쓰는 것이 훨씬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 때는 그냥 일상이 피곤했다. 일주일에 이틀 삼일씩 밤을 새고 앉았으니 갑자기 팍 고꾸라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간 해온 가닥이 있으니 관성이 있어서 읽고 쓰는 일을 멈출 수 없었을 뿐, 진심으로 즐거웠던 것 같지는 않다. 이때가 아마 읽고 쓰는 일에 대한 1차 암흑기가 아니었을까.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공은 별로 내 성향에 맞지 않았다. 세상을 숫자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0과 1뿐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0과 1만을 가지고 굳이 그 사이에 펼쳐진 세계를 표현하려고 발버둥쳐야한다는게 너무 이상했기에 이번에는 0과 1을 제외하고, '0과 1 사이의 숫자'를 취급하는 학과를 선택해 이중 전공을 했다.


0이고 1이고, 0과 1 사이고 간에 '숫자'를 다루는 전공을 택한 학생들은 대개 "글을 못쓴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그렇다. 4년 내내 죽어라 숫자와 씨름하니 글보다 숫자가 익숙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압도적인 양의 공부를 하면서도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글로 못써서, 그리고 말로 못해서다. 전공 공부를 하지 않는 시간에 스스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관련 소양을 키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 있었던 덕분인지 나는 그 와중에 평가를 좋게 받았던 것 같기도. 전공이 두개가 되어버린 탓에 남들보다 학교를 오래 다니긴 했지만 감격스럽게도 학위를 두개 받았고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도 했다.


대학 생활 6년 동안 내 스스로 내 수명을 깎는 일에 질려버린 터라 워라밸(그 때는 워라밸이라는 말이 없었지만)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업종의 회사로 입사했다. 상황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근로 장학생으로 선발되고 난 후, 알바도 교내 도서관에서 했다. 누군가는 도서관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나를 기억할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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